연재칼럼

[말글살이] 배운 게 도둑질

닭털주 2023. 9. 9. 12:18

[말글살이] 배운 게 도둑질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날이 밝으면 어제와 다른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처럼.

하지만 현실은 쳇바퀴 도는 다람쥐처럼 제자리걸음. 어제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숙명이란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 붙이는 이름인가 보다.

 

배운 게 도둑질이란 말에는 지금까지 해온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현실인식이 담겨 있다. 자기 일에 대한 겸손함의 표현이자 삶의 일관성을 부여하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그릴 수 있는 원의 반지름은 여기까지!

배울 수 있는 게 한둘이 아니건만, 하필 도둑질이라니. 말이란 참 짓궂다.

 

도둑질은 직업인가 버릇인가.

물건을 훔치되 잡히지 않으려면 섬세한 기술을 갈고닦아야 한다는 점에서 전문성(?)을 인정해 줘야 할지도 모른다.

약간의 요령만 있으면 되는 주먹질, 싸움질, 이간질, 걸레질, 망치질과 사뭇 다르긴 하다.

 

도둑질이란 말에서 풍기는 부정적 느낌을 잠시 접고,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내가 배운 도둑질은 무엇인가? 살갗처럼 내 몸에 붙어 있어 떼어낼 수 없는 일은 무엇인가? 나도 회사원 생활을 한 적이 있는데, 천성이 게을러서 정시 출근과 정해진 업무를 반복하는 게 싫어 그만두었더랬다.

그때 낮게 읊조렸었지. ‘내가 배운 도둑질은 기껏 선생질인가’.

 

자기 생에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걸 분간할 수 있는 사람은 지혜롭다.

다만, 과거에 사로잡혀 지레 할 수 없다고 선을 그어버리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숙명과 분수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끔은 경계 너머로 발 내딛는 용기도 필요하다.

도둑질밖에 배운 게 없는 사람들이 권력의 주변에 몰려든다는 소문을 듣고 드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