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쓰다 43

나이가 들면

나이가 들면 주상태 나이를 먹으면 몸은 망가지는데 마음은 단단해진다 먹어도 먹어도 배부른 것은 아닌데 나이는 신기하게 마음이 불러온다 친구들이 싫은 소리해도 이해가 되고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갈 때도 슬프지만 눈물 나지 않는다 마음이 넉넉해지니 나도 그런 마음 먹은 적 있으니 지금 다시 먹어도 괜찮거니 사랑하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는 것도 행복한 것이니 나이를 먹으면 배가 부르고 속이 단단해짐을 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면 아무 소용없을 때도 있다 오랜 책쟁이의 고질병으로 눈두덩이 아려오면 얼음찜질로 몸을 달래어야 하고 술이 마음을 흔들리게 할 때도 장을 달래기 위해 몇 끼를 쉬어가야 하고 물렁뼈는 왜 그리 자꾸 자리를 빠져나가는지 나이가 들면 산을 오르는 일보다 내려가는 일이..

시를쓰다 2024.03.15

한강을 달려보니 알겠다

한강을 달려보니 알겠다 주상태 한강을 달려보니 알겠다 출렁이는 물결처럼 흔들리는 뱃살을 느끼며 시지프스의 운명처럼 버티는 삶이다 벗어날 수 없는 삶은 차가운 아침 공기 속 흐릿하게 비치는 꿈이라는 것을 샤워를 하다 보니 알겠다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은 나의 마음이 아니라 내 몸이 아니라 녹슨 고철 덩어리가 되어 도시를 떠돌던 욕망이라는 것을 이끼 낀 욕된 껍데기라는 것을 한강을 달리고 한강이 흐르고 가쁜 호흡 가다듬으며 앞서 달리는 자전거 속에서 미처 붙잡지 못한 연인들을 본다 한강을 달려보니 알겠다 한강을 달리지 못한 것은 한강이 멀리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가 너무 멀리 가버렸다는 것을 한강이 아름다운 것은 내가 너무 아름답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시를쓰다 2024.03.14

학년 수련회이야기

학년 수련회이야기 주상태 버리고 와야 할 것들이 있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지 못한 기억을 지우는 일은 삶을 추억하는 낭만에 젖어 드는 일이다 가끔 찾아오는 바닷가에서 마냥 즐거울 수 있는 것은 바닷가였기 때문이고 푸르름을 보았기 때문이다 파문을 일으켜도 파도의 시간을 기억하는 것은 내가 선택한 일이었기보다 나를 선택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다 건너 산이 보이고 산을 건너 하늘이 보이고 하늘 위에 물고기가 날아다니고 물속에서 강아지가 뛰노는 풍경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비 오는 날 해변의 아침 안개가 흩뿌려진 바닷가의 외침 나를 지우고 너를 지우고 생각을 지우는 일을 기억한다 해변의 시간을 위하여 파도에 묻혀버린 안개에 숨어버린 아이들의 외침을 다시 듣는다

시를쓰다 2024.03.13

터미널에서 길을 잃다

터미널에서 길을 잃다 주상태 하필이면 터미널이다 고속으로 간다는 곳에서 길을 잃었다 광주로 갈 수도 있고 부산으로 강릉으로 갈 수도 있는데 서울에 살기에 지하철 교대역에 내려야 2호선을 탈 수 있고 고속터미널역에 내려야 7호선을 탈 수 있고 9호선도 탈 수 있다 9호선을 타고 가는 길은 우리집에서 세상을 만나러 가는 길인데 동작역에 내려야 4호선을 탈 수 있는데 가끔이다 고속터미널역에 내려 2호선을 기다리고 교대역에 내려 3호선을 기다린다 고속으로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터미널로 가야 한다는 무의식을 만나 삶을 내팽겨 친다 흥분하지 말아야 한다 시계를 보지 말아야 한다 한 정거장만 더 가면 이수역에 가고 이수역에선 4호선으로 갈 수 있다 한 정거장만 더 가면 천국으로 갈 수 있고 마음먹고 한 정거장만 더..

시를쓰다 2024.03.12

청소년 쉼터를 위한 서시

청소년 쉼터를 위한 서시 주상태 쉴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쉴 곳이 있다는 것은 사랑이다 꿈을 꿀 수 있는 것은 버틸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는 일이다 무작정 나왔던 무심코 뿌리치고 나왔던 아이들이 잠시 머무르는 곳 오래 머물 수 없는 자리 하늘이 맑은 날이나 바람이 부는 날에도 가슴에 그리움을 묻고 사는 시간이다 이유없이 짜증이 날 때도 있고 생각없이 화를 내거나 욕을 하기도 하지만 친구들과 함께 있고 싶고 그들과 헤어지길 두려워하고 함께 멀리 떠나고 싶은 것은 쉼터가 있기에 꿈꿀 수 있다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졸음을 이겨내게 해주고 할 일을 끝까지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책도 아니고 선생님도 아니고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기까지에는 눈물이 필요했고 담배도 필요했고 친구도 필요했다 요리 잘하는 내 ..

시를쓰다 2024.03.11

에슐리에 갔다가

에슐리에 갔다가 주상태 먹는 것이 즐거움이 되는 시간 살을 말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많이 즐기기 위한 인간의 욕망을 위한 축제 굶주린 사자처럼 포만감을 즐기다가도 오뚝 솟은 사내를 보고 외면하듯 야채에 손길을 보내고 음식 따로 음료수 따로라고 하지만 후루룩 삼키고 짭짭 넘기고 소리로 즐기고 눈으로 누리는 오늘의 요리는 파스타 덤으로 닭다리 마늘 돼지고기 누들요리는 곁들인 멋스러움 단돈 3,000원에 와인 3종 무한리필 술술 넘어가듯 술과 소리가 어울리면 차고 넘치는 줄 모르는 일 살아있다는 것은 먹는 일 혀끝에서 전해져오는 생명의 소리 허전함을 고기로 채우고 나면 삶이 보인다 사랑마저도 우정마저도 배고픔 앞에서는 사치가 된다

시를쓰다 2024.03.09

시가 나오는 풍경

시가 나오는 풍경 주상태 나에게 시는 절망 속에 피어나거나 환희 속에 울러 퍼지거나 꼭꼭 눌러 담은 밥 위에 솟아 오른 활화산 참는다고 참아지지 않고 부르고 싶다고 불려지지 않는 노래 스치는 바람결에 쓰러지다가도 언뜻 웃으면서 다가오기도 하고 미워죽겠다고 소리치면서도 가슴 한켠에선 살겠다고 아우성이고 미안하다는 말 못하게 하면서도 가끔 눈물짓는 걸 보면 미안해서 잠을 설치게 만드는 미쳐도 죽지 못하는 사랑 미워도 살아 숨쉬는 사랑 나에게 시는 친구보다 더 각별하고 애인보다 더 진하게 다가오는 길이 막혀 돌아 나오는 길에 서 있고 돌다 돌다 지쳐서 돌아오는 고향길에서 만나 한 시름 놓고 수다 떠는 바람이 전해져오는 눈물 아쉬워도 잊어버려야 하는 아픔 더욱 보듬고 마는 삶

시를쓰다 2024.03.08

수업에 대하여

수업에 대하여 주상태 가쁜 숨 몰아쉬고 달려가다가 호흡 가다듬고 멈추어 서는 곳 생명을 위하여 삶을 위하여 거창한 구호로 말하지 않고는 다가설 수 없는 시간 미안해하지 않으면서 당당하게 무기로 치장하고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고 전쟁을 치르는 듯 삶을 주관하는 듯 가장 엄숙하게 때로는 비굴하게 때로는 사랑스럽게 나를 말하지 않고 가르치는 시간 강요하지 않으며 가슴으로 다가서길 바라는 순간 그는 사라지고 그들의 명언은 가슴을 후비고 온몸은 멍으로 상처는 거친 입담 속에서 좌절하고 새 생명이 태어나고 마치 드라마처럼 나타나고 정말 순수하게 때로는 순진하게 새들처럼 하늘을 날다 어쩌다 떨어진 깃털처럼 타락하는 시간 속에 주워 담지 않아도 마음 가득 넘치는 보이지 않는 힘들의 잔치 사라지고 호흡 가다듬고 벌이는 작..

시를쓰다 2024.03.07

삼겹살을 먹으면서

삼겹살을 먹으면서 주상태 밥만 먹으려다 삼겹살까지 먹게 되었다 너무 쉽게 내린 결정에 욕망 탓만 한다 오랜 배고픔 속에 너무 쉽게 뒤집고 또 뒤집고 익을 틈도 없이 게걸스럽게 넘기고 나면 모두 살이 되고 모두 쌀이 될 것 같다 꿈을 음미하기엔 경쟁이 치열하다 공복의 기쁨보다 공복의 간절함을 위하여 마늘도 상추도 고추마저도 춤을 춘다 영혼마저 팔아먹을 만큼 절실한 시대를 가정하고 나를 가장한다 삼겹살을 먹는다는 건 고픈 배가 아니라 슬픈 배를 위한 일이다 남은 의식은 고개 숙이며 잔을 올리는 일 두 배로 올리던 두 바퀴를 돌리다 말던 이미 삶은 쏟아진 물처럼 계속되고 느닷없이 비마저 내린다 목에 걸린 가시처럼 삶이 위태롭다 그래도 삼겹살은 맛있다

시를쓰다 2024.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