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쓰다 43

장대비가 쏟아지면

장대비가 쏟아지면 주상태 비가 오는 날이면 빗소리를 음악삼아 막걸리를 마신다 호우특보 강풍경보도 안타깝지만 나를 울리는 것은 지붕을 때리는 따가움 가슴을 파고드는 외로움 공휴일이면 으레 보는 특선영화 같은 것 경기북부 파주에서 전해오는 침수피해는 기어이 뉴스거리로 다가오고 만다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뉴스거리로 남는 것 한동안 살았다가 사라지는 하루살이같은 것 의미있는 일이란 비가 내리고 거칠게 다가와 음악이 된다는 것 도시에서 마비되어버린 감성이 길 잘못 찾은 내비게이션처럼 가는 길은 그곳인 줄 알고 뇌비게이션보다 낫다고 여기는 슬픔 몸마저 술을 이기지 못하면 가지런히 놓인 진열장 상품처럼 팔리지 않는 몸을 누이고 기다릴 뿐 이미 팔린 줄도 모르고 아직 팔리지 않은 줄 알면서도 반복하고 반복하다 생을 마..

시를쓰다 2024.02.23

주부 날다

주부 날다 주상태 노랫소리 높이지 않고도 빨래를 널고 음악 틀지 않아도 설거지에 빠져드는 것을 보면 얼추 주부가 되었나 보다 일상이 때로는 사람을 키우는 법 목욕을 하다 가도 욕조를 닦고 이빨을 닦다 가도 세면대를 닦는 것은 주부가 아닌 듯 일상이 사람을 죽이는 법 오지 않을 미래를 위하여 전자렌지의 속을 마음 청소하듯 칫솔로 문지르고 싱크대 오물을 내장 긁어내듯 정성스레 냄새를 감수한다 주부가 된다는 것은 가정을 알게 된다는 것 살림을 한다는 것은 삶을 가꾸는 일 고무장갑이 손 건강에 좋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오늘 느낌 그대로 간직하고 싶은 것은 주부가 되어 하늘을 날기 위한 연습 같은 것 꿈을 꾸지 않아도 가슴 뭉클해지는 사랑 같은 것 나는 오늘도 손빨래를 한다

시를쓰다 2024.02.21

잘 산다는 것에 대하여

잘 산다는 것에 대하여 주상태 나의 잘못은 너무 빨리 일어선 것이다 바람 불 때 빨리 쓰러지고 엎드려 있던 그대로 버티지 못하고 꿈틀거리다 뻗지도 못하면서 일어서기에 몰두한다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일어서는 것 바람 불어오는 곳에서 태어나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삶이라면 비바람을 이기는 연습으로 바람으로 버텨야 살 수 있다는 것을 살아야 하는 일에 몰두하다가 살지 못하고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다 산다는 것마저 놓치고 그래도 축복은 바람이 불어서 쓰러지고 바람이 불지 않아도 쓰러질 수 있다는 것 너무 빨리 일어서지도 말며 너무 빨리 쓰러지지도 말아 2012. 10. 14

시를쓰다 2024.02.20

이제 휴힉을 취하려 하네

이제 휴식을 취하려 하네 주상태 숨가쁘게 달려오다가도 멈추지 못한 이유가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위한 것만이 아님을 안다 그저 태양이 뜨지 않아도 시간 속에서 제어되고 좁은 공간을 벗어날 줄 모른다 화려한 조명을 받다가 무대 뒤로 돌아간 시간 나를 잊은 채 일 속에서 허덕이다 잠자리로 돌아간 시간에도 나는 숨소리만 낼 뿐 가쁜 숨소리만 날 뿐 아픈 가슴을 위하여 손 내밀지 못한다 제자리를 맴도는 치매 걸린 사람처럼 머리를 위하여 가슴은 한마디 하지 못한다 초조해진 마음으로 밤을 지새던 어느 새벽에 망가진 외장하드를 복구하는 것처럼 삶을 복구하기란 들숨과 날숨의 쉼 없는 고통 속의 소통 더 지치기 위하여 더 아프기 위하여 산소가 부족한 붕어처럼 입만 벌리고 있다 이제 쉬어야 할 듯 이제 살아야 할 듯

시를쓰다 2024.02.19

예술영화를 위하여

예술영화를 위하여 주상태 삶이 한쪽으로 쏠릴 때 영화를 본다 삶이 아닌 것처럼 내가 아닌 것처럼 나도 그들처럼 절망 속에서 나를 건져내고 혹은 뿌리치면서 영화는 끝이 나고 삶은 시작된다 ‘시작은 키스’ 98% 부족해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실수 때문이었다 가보지도 못한 길을 가슴 졸이다가 걸어가는 마음으로 키스가 시작되고 삶은 벼랑 끝에 피어난 작은 꽃처럼 버림받기 싫어 엄마 손 놓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두려움에 떨다가 겁먹은 사랑은 달아나다가 그녀가 보이고 삶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거센 비는 쏟아지고 따뜻한 방안에 작은 등불을 켠다 영화로 삶을 그리워하고 삶은 영화처럼 아름답진 않지만 여름날 소나기처럼 나를 찾아온다면 사랑을 위하여 영화를 볼 것이다 사랑도 영화처럼 삶도 영화처럼 2012. 8. 1

시를쓰다 2024.02.18

양념반 후라이드반

양념반 후라이드반 주상태 일요일이 되면 우리 집에는 잔치가 벌어진다 주 5일제 이후 한자리에 모인 가들은 제각기 꿈꾸던 주말을 보내고 맥주, 와인 그리고 콜라 배부른 자만이 먹을 수 있는 치킨을 먹는다 여가수가 부르는 치킨도 좋고 우리 동네 치킨도 상관없다 그냥 양념반 후라이드반 이유가 많다는 것과 이유가 필요하다는 것을 넘어선다 한 명의 가족이라도 단 한 명의 가족이라도 있다면 해질녘의 저녁 파티는 풍성해진다 양념을 먼저 먹고 후라이드를 나중에 먹는 것이 아니라 양념과 후라이드를 각각 먹고 각각 나누어주기도 한다 양념은 오랫동안 나누지 못한 대화를 대신하고 후라이드는 날 것으로 얼굴을 마주할 것을 주문하고 맥주는 이제는 잊어버릴 것을 와인은 축배로 콜라는 후일담으로 생성된다 삶은 맥주 한 잔으로 충분히..

시를쓰다 2024.02.17

아프다는 것에 대하여

아프다는 것에 대하여 주상태 손가락 관절이 아리다 손가락 꺾기를 거듭하면서 뼈와 살의 경계를 생각한다 뼈만 남아있는 앙상한 모습과 살의 효용을 고민하다보면 내 몸은 해체된다 산산조각으로 부여잡고 잠에서 깨어난다 내가 아프면 몸이 아픈 것이고 내가 아파하면 마음도 아플 것이다 피가 흐르지 않는 세상에서는 살을 에는 아픔도 느낄 수가 없지만 머리를 흔들다 잠을 설친다 맑은 하늘을 꿈꾸며 기어코 눈을 뜬다 삶이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이 아니라 죽음이 나를 불러낸 것이다 희망의 바람이 분다고 저주의 비가 내린다고 함박눈이 쏟아진다고 먹구름이 몰려온다고 관절이 먼저 알아 차리지만 일어설 기운은 없다 바람이 불지만 달려야 할 때가 있다고 비가 올 것 같지만 달려야 할 때가 있다고 우기고 우기면서 나에게 말한다 깨어나..

시를쓰다 2024.02.16

술배를 타고

술배를 타고 주상태 술배를 타고 친구 만나러 간다 일이 아니라 술이 고파서 알고 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즐거울 때 명동에서 등갈비도 먹고 흑석동에서 생삼겹살도 구워 먹고 홍대 골목길에서 막걸리도 넘기고 시청이 보이는 곳에서 맥주도 마신다 술배와 친구가 정비례하는 것이 두렵지 않을 때 삶은 가까이 있고 꿈은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지만 꺾어지는 나이가 힘들었던 사람은 안다 고비고비 함께 탔던 배가 차고 넘칠지라도 세상은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술잔을 마주하는 날 잔에 술이 출렁대는 시간 말이 늘어나고 친구가 많아지고 살이 불어가지만 절대로 긴장하지는 말 것 어차피 술이 배로 가던 배가 술로 가던 노 저어 강을 건너야 하는 사람은 자신이기에 넓은 강은 넓은 대로 좁은 강은 좁은 대로 좋은 세상 보고 싶으면 ..

시를쓰다 2024.02.15

술 한 잔 건네다

술 한 잔 건네다 주상태 목숨 걸고 마시는 것은 아니다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새로운 친구 맞이하는 것처럼 사람이 술을 부른다 낙엽이 나무의 생존본능이듯이 사람도 감성본능으로 세월의 흔적을 찾아간다 가을비 맞은 잎새들이 눈부시게 빛나는 시간 가슴 아리게 다가서는 날 귀가 길 외등이 나를 감싸고 모든 것을 가리고 마는 어둠만이 나의 세상인 듯 호탕한 웃음으로 거친 숨소리로 마음껏 삶의 잔해들을 뱉어낸다 누가 그랬던가 술 한 잔 건네는 사이는 인간 사이라고 차 한 잔 건네는 사이는 친구 사이라고 술을 건네는 시간 삶을 건넌다 목숨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시를쓰다 2024.02.14

순대국밥을 먹으며

순대국밥을 먹으며 주상태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올라온 서울 순대국밥은 우리 삶의 체중계였다 한 그릇 말끔히 비웠던 밥이랑 머리고기는 누구의 양식이었고 구석자리는 우리의 차지였다 얼굴 붉히며 조여드는 수치심보다 매일 아침밥을 걱정했기에 순대 국 그리고 밥은 우리에게 따로 다가왔다 10년이 지난 겨울에 IMF도 지나고 미국발 금융위기도 지났지만 여전히 추운 도시는 한 그릇으로도 겨우 버티고 한 그릇으로 한 사람이 버틴다 눈물보다 한숨이 그립고 아픔보다 사랑이 다가오지만 순대국밥은 가끔 먹는다 이제 순대국밥은 내 몸의 체중계가 되었기에

시를쓰다 2024.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