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쓰다 43

사생대회를 가다

사생대회를 가다 주상태 그림을 그리러 가는 건지 나를 그리러 가는 건지 붓으로 그린 나무 시들어버리고 펜으로 그린 동물 사라져버린다 모두들 박제된 풍경 속으로 블랙홀에 빠진 것처럼 물통 속에 던져진 빨간 물감은 번지고 번지고 화판 위에서는 붉은 피로 번지고 번지고 진한 나무는 덧칠을 어렵게 만드는 먼 미래 나를 길러낸 것은 그늘 아래 앉아 주먹밥 먹고 수다 떠는 입들 대충 칠한 나무들만 살아남는 우리는 숲속의 나무 그림 속으로 들어 간 나무는 사라지기 전에 시들기 전에 덧칠해져야 한다 조잘거리는 웃음 속에 오후 햇살은 따갑게 시간을 가르고 있다

시를쓰다 2024.03.05

북한산에 오르다

북한산에 오르다 주상태 새 신을 신고 바위를 오른다 하늘을 향하는 발걸음은 씩씩하다 바람은 산허리를 머물다 흘러간다 오르지 않으면 내려다볼 수 없기에 걸음은 가볍다 족두리봉까지 오르는 일이 시작이라면 사모바위는 삶을 다시 챙기고 인수봉에 이르는 일은 감격이고 절벽을 넘어 가파른 길을 구름을 밟고 나아간다 발을 길게 뻗어 손까지 잡힐 것 같은 곳 눈으로 깨끗하게 씻어낸 풍경들 굽이굽이 솟은 꿈들 스쳐 가는 바람이 싱그럽다 성곽 위에 누워 나비를 상상한다 일찍이 불러보지 못한 사람들을 그리워한다 미처 보지 못한 시간을 바람 속에 갇혀버린 이야기들을

시를쓰다 2024.03.04

도예에 빠지다

도예에 빠지다 주상태 이른 아침 고운 햇살 받으며 꿈을 꾼다 바람이 길을 잃고 머문 자리에 오랫동안 잊었던 소꿉장난 떠올리면서 작은 숲을 그릇에 담아본다 판을 밀어 접시를 말아 올리고 흙가래 메워 화병을 이루고 코일로 쌓다가 뭉개 뜨려 쌓아 올리다 펼치다 어느새 꿈은 큰 그릇으로 큰 그릇 위에 꽃, 새, 물고기, 집, 구름 그리고 새겨 넣는 작은 이름들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운 사람들 그릇 만드는 시간 욕심이 더해지고 흙을 만지는 시간 욕심이 사라지고 움직이는 손길 따라 마음도 흘러내린다 바람이 머무는 곳 땀들이 모여 정직한 시간 들이 숲을 이룬다

시를쓰다 2024.03.02

도서관을 위하여

도서관을 위하여 주상태 지도 없이 떠나는 삶이 향기롭지만 방황하는 삶 뒤에 숨겨진 비밀을 찾아가는 여행은 더욱 마음 아리게 만든다 책 읽는 모습이 아름다운 것은 그들을 위한 축제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때론 풍성 한대로 때론 허전 한대로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먹는 군고구마처럼 호호 불어가는 온기가 흐르는 꿈의 공간을 상상한다 왁자지껄 조잘조잘 점심시간이면 으레 찾아오는 풍성한 소리 삶의 노래는 장날 맛보는 향기 같다 책을 거스르지 않고 침묵 속에서 바라만 봐도 곁에 있는 책들은 외롭지 않다 위태로운 삶이 아니더라도 휴식을 취할 수 없을지라도 그들에 의한 그들을 위한 풍경은 아름답다

시를쓰다 2024.03.01

공을 차다 보면

공을 차다 보면 주상태 가슴이 뚫리지 않는 날 공을 차다 보면 나도 공처럼 날아가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날 멀리 여행을 떠난다 추운 날이 오면 가슴을 열고 싶어도 열 수가 없고 가끔 날아오는 카톡도 나를 부르지 않고 가두기만 한다 조금 멀리 떠나 있다 보면 그리운 마음 사라질 것 같고 사랑마저 떨쳐버릴 것 같고 삶을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공처럼 차이다가 골문에 부딪쳐도 안으로 집어넣는 사람도 있고 밖으로 내지르는 사람도 있다 차라리 내지르는 것이 찢어지는 가슴에 미련을 갖지 않는 것 공을 차지도 못하는 사람이 공을 찰 수 있다면 멀리 같이 날아가고 싶다

시를쓰다 2024.02.29

가을을 타다

가을을 타다 주상태 비단 가을이 와서 우울한 것은 아니다 바람부는 날 눈물나는 것은 흔한 일이 되어 버렸다 잊혀진 계절 속에 사람이 하늘을 그리워하는 시간 골목에선 아픔이 지나가고 만날 수 없는 슬픔에 멍든 가슴은 계절을 품는다 사랑하고픈 날 눈물 훔치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지독하게 그녀를 기다리는 시간 정거장에선 이별이 스쳐 가고 잊어야 하는 현실에 아침은 더디 오고 만다 찻잔 속에 여윈 달이 떠오르는 시간 폭풍이 지나가고 내 사랑도 추억이 되고 눈물이 난다고 반드시 그리워하는 건 아니다 가슴 타는 계절이 오면 사랑이 그리운 법이다

시를쓰다 2024.02.28

가을 사랑

가을 사랑 주상태 아내처럼 사랑이 찾아 왔다 나를 관리하듯 관리하지 않는 듯 오래된 부부처럼 사랑은 팔짱부터 끼기 시작했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언제나 해맑았고 주인이 부르는 명령처럼 항상 복종해야만 했다 여름이 지날 때까지는 눈치채지 못했다 가을이 올 거라고 사랑이 올 거라고 재촉한 것도 아닌데 서둘러 오는 것처럼 찾아오고 삶은 길을 잃은 듯 휘청거렸다 바람이 불어도 찾아오지 않던 사랑인데 나의 심장은 삶을 거부하고 있었다 처녀처럼 사랑이 파고든다 주체하지 못할 사랑 가을을 넘기지 못할 정도로 벅찬 사랑 나를 버리며 받아들인다 꿈속으로 숨어든다

시를쓰다 2024.02.27

풀빵을 위하여

풀빵을 위하여 주상태 눈물젖은 빵을 먹기 위해 애썼던 시절 사랑했던 풀빵은 어느새 붕어빵 팥빵 크림빵 옥수수빵으로 진화하여 오늘 아침 밥상에 올랐다 족발을 사달라는 딸의 문자메시지를 보고도 답장 보내지 못했던 추운 날의 일용직 아버지는 다음 메시지가 올 때까지 꺼억꺼억 울음을 삼켰다 “아빠, 고기가 아니면 잉어빵이라도 사오세요.”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겨울날의 아버지는 서둘러 오던 길을 되돌아가 칼날 같은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아침은 풀빵 3개 팥빵 크림빵 크림빵 전자렌지 속에서 제각기 사연을 가지고 돌고 또 돈다. “아빠, 옛날에는 풀빵이라고 했어요?” 방긋 웃으면서 푸짐한 밥상이라며 아빠를 위로하는 딸아이를 보면서 할 말을 잃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야 하는 시대 풀빵은 언제쯤 그..

시를쓰다 2024.02.26

책에 갇히다

책에 갇히다 주상태 목이 메이면 쉬어가면 되고 길이 막히면 돌아가면 되는데 책이 길을 막으면 온전히 삶이 막힌 것 같다 책을 성처럼 쌓아 가두고 한 권 한 권 책을 삼키고 책을 어르고 책으로 길을 만들며 나아간다 무너질 것 같은 벽은 다시 쌓으면 되는 것 어제 보고 싶었던 책은 오늘 만났던 책에 밀리고 내일은 다른 책 속에서 허덕인다 제목이 보이도록 할 것 친구끼리 짝을 지어둘 것 이름은 기억할 것 한 권이 아니라 두 권이라도 나에게는 모두 책인걸 책에 막히면 내 삶은 정체되고 잘못 찾은 커피 자국에도 가슴 아려하고 버려진 책갈피를 책 속에서 다시 펼치려 하면서 책은 영혼의 가장 낮은 곳에서 울림을 시작하고 나를 흔들고 나를 가두고 나를 버리기도 하고 나를 막지만 책을 버리지 못하는 삶 가끔 절망이 되는..

시를쓰다 2024.02.25

찜닭과 칼국수 사이

찜닭과 칼국수 사이 주상태 요즘 우리 딸은 참 말이 많다 전화하면 1분 안에 달려 나오라고 오늘은 찜닭이 당기니까 그것으로 하고 내일은 비싼 것 먹었으니까 칼국수로 하잔다 닭 반 마리가 2인분이니까 조금 허전하다고 길거리 맛탕 먹잖다 식으면 맛없다고 꼬챙이로 입안에 밀어 넣고 한 개 먹으면 정 안 든다고 한 개 더 생각 없는 것처럼 말하면서도 나를 무척 생각하는 듯 저녁 먹을 때마다 보는 탓인지 요즘 우리 딸은 말이 많다 갓 태어난 아기처럼 묻고 또 묻는다 빵점짜리 아빠 되지 않으려고 눈을 보고 이야기하다가 입만 보고 대답한다 세상이 두렵지는 않지만 가족이라는 생각에 가끔 목이 메인다 언젠가 나도 딸에게 말이 많을 것을 생각하면 갑자기 목젖이 젖어온다 딸이 말이 많은 것처럼 삶이 말이 많아질 것처럼

시를쓰다 2024.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