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읽다 6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하종오 우리는 우리끼리 하는 말로 태어나면서도 넓디넓은 평야 이루기 위해 태어났제 아무데서나 푸릇푸릇 하늘로 잎 돋아내고 아무데서나 버려져도 흙에 뿌리박았는기라 먼 곳으로 흐르던 물줄기도 찾아보고 날뛰던 송장메뚜기 잠재우기도 하고 농부들이 흘린 땀을 거름 삼기도 하면서 우리야 살기는 함께 살았제 오뉴월 하루볕이 무섭게 익어서 처음으로 서로 안고 부끄러워 고개 숙였는기라 우리야 우리 마음대로 할 것 같으면 총알받이 땅 지뢰밭에 알알이 씨앗으로 묻혔다가 터지면 흩어져 이쪽 저쪽 움돋아 우리나라 평야 이루며 살고 싶었제 우리야 참말로 참말로 참말로 갈라설 수 없어 이 땅에서 흔들리고 있는기라

시를읽다 2022.02.15

이 시대의 사랑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최승자 불러도 삼월에는 주인이 없다 동대문 발치에서 풀잎이 비밀에 젖는다. 늘 그대로의 길목에서 집으로 우리는 익숙하게 빠져들어 세상 밖의 잠 속으로 내려가고 꿈의 깊은 늪 안에서 너희는 부르지만 애인아 사천년 하늘빛이 무거워 우리는 발이 묶인 구름이다. 밤마다 복면한 바람이 우리를 불러내는 이 무렵의 뜨거운 암호를 죽음이 죽음을 따르는 이 시대의 무서운 사랑을 우리는 풀지 못한다.

시를읽다 2022.02.11

봄 이성부

봄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돟ㄴ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비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 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시를읽다 2022.02.08

마음의 짐승 이재무

마음의 짐승 이재무 몸의 굴 속 웅크린 짐승 눈뜨네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수성, 몸 밖의, 죄어오는 무형의 오랏줄에 답답한 듯 발버둥치네 그때마다 가까스로 뿌리내린 가계의 나무 휘청거리네 오랜 굶주림 휑한 두 눈의 형형한 살기에 그대가 다치네 두툼한 봉급으로 쓰다듬어도 식솔의 안전으로 얼러보아도 도박, 여자, 술로 달래보아도 오오, 마음의 짐승 세운 갈기 숙이지 않네

시를읽다 2022.02.04

강물은, 변절도 아름답다 김윤배

강물은, 변절도 아름답다 김윤배 붉게 물드는 교각 사이로 해가 진다 강물은 네가 맴돌던 자리를 떠나 천천히 흐른다 잔업 있는 날은 네 노래 들으며 처녀애들 철없이 물드는 연분홍 손톱 물어뜯었다 더는 꿈꿀 수 없게 된 내일을 물어뜯어 네 노래 자주 마디 잘리고 애써 웃음주었을 네가 저 물길 어딘가를 흐르며 강물 온통 슬픔으로 일렁이게 한다 강물은, 변절도 아름답다 강물 몸빛 바꾸어 흐른다 강안 풍경들이 천천히 굳어지고 강물 어둠의 등을 꿈틀대며 흐른다 흐르며 여린 꽃잎 강안으로 밀어낸다

시를읽다 2022.02.03

나의 싸움 -신현림

나의 싸움 신현림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한다 지상에서 남은 나날을 사랑하기 위해 외로움이 지나쳐 괴로움이 되는 모든 것 마음을 폐가로 만드는 모든 것과 싸운다 슬픔이 지나쳐 독약이 되는 모든 것 가슴을 까맣게 태우는 모든 것 실패와 실패 끝의 치욕과 습자지만큼 나약한 마음과 저승냄새 가득한 우울과 쓸쓸함 줄 위를 걷는 듯한 불안과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

시를읽다 2022.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