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읽다 14

우리 시대의 시

우리 시대의 시함기석 시청광장에서 처형된 사형수다그녀의 눈동자에 고인 12월의 밤하늘이고목에 걸린 인조 목걸이다 육교 계단에서 추위에 떠는 고아들녹슨 빗속을 최면 상태로 걸어가는 부랑자들이고젖은 불빛이다 낫들이 활보하는 도시거리엔 웃음 없는 무녀의 피가 떠돌고, 우리의 얼굴은죽음이 화인 火印으로 남긴 검은 판화들 잠들면 종이가 자객처럼 내 눈을 베는 소리 들리고고열과 오한 사이에서 나의 펜은눈물을 앓는 새

시를읽다 2025.05.25

한 시절 잘 살았다

한 시절 잘 살았다송경동 나는 내 시에푸르른 자연에 대한 찬미와 예찬이 빠져 있음을한탄하지 않는다 나는 내 시에부드러운 사랑에 대한 비탄과 환희가 빠져 있음을아쉬워하지 않는다 나는 내 시에저 드넓은 우주에 대한 경배와 경이로움이 빠져 있음을억울해하지 않는다 나는 내 시에빛나는 전망과 역사에 대한 확고한 낙관이 반영되지 못했음을그닥 반성하지 않는다 가령 뜨거운 화덕 앞에서 일하는 사람들가령 뙤약볕과 추위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가령 착취와 차별과 폭력과 모멸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 한 시절 인연이 그들 곁이었으므로그들의 비천하고 비좁은 이야기로 내 시가 가득찼음을 후회하지 않는다 한 시절 인연이충분히 고귀하고 행복한 세상과 절연하고고통만이 전부인 세상과 교통하는 일이었으므로그 절규와 아우성으로부터내 시가 몇 ..

시를읽다 2025.05.22

돌이 천둥이다

돌이 천둥이다이재훈 아득히 높은 곳에서 넘친다.우리들의 간원으로 쏟아지는 소리.사람을 뒤덮고소원을 뒤덮고울분을 뒤덮고단단한 죄악을 뒤덮는다.작은 돌이 굴러가는 소리.머릿속이 눈물로 가득하다.새벽마다 삼각산 나무 밑에서방언을 부르짓는 사람들.맨살을 철썩철썩 때리며병을 고치는 사람들.소리는 시간을 앞질러 간다.엄마, 하고 부르면한없이 슬픈 짐승이 된다.아주 오래전돌로 하늘을 내리치면벼락이 치고 천둥이 울렸다.천상의 소리가 대답했다.울 곳이 없어돌 속으로 들어왔다.온몸이 징징 울리는 날들이다.

시를읽다 2025.05.12

우린 언제쯤 고요해질까요

우린 언제쯤 고요해질까요김용만 비 옵니다새벽 빗소리 듣습니다어둡지만 잘 찾아옵니다우리 집에 내리면 제 손님입니다지붕에 돌담 위에 나뭇가지에 그 소리모두 다릅니다그래서 재미있습니다사는 게 재미있어야지요제 소릴 품어야지요시원한 밤공기가 좋습니다아내도 빗소리처럼 새근새근 잡니다적막한 밤이기에 그 곤한 소리가슴에 닿습니다고요는 귀한 소리를 듣게 합니다우린 언제쯤 고요해질까요

시를읽다 2025.04.25

이것이 날개다

이것이 날개다 수정 2025.04.20 20:20 이설야 시인 뇌성마비 중증 지체·언어장애인 마흔두살 라정식씨가 죽었다.자원봉사자 비장애인 그녀가 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조문객이라곤 휠체어를 타고 온 망자의 남녀 친구들 여남은명뿐이다.이들의 평균수명은 그 무슨 배려라도 해주는 것인 양 턱없이 짧다.마침, 같은 처지들끼리 감사의 기도를 끝내고점심식사 중이다.떠먹여주는 사람 없으니 밥알이며 반찬, 국물이며 건더기가 온데 흩어지고 쏟아져 아수라장, 난장판이다.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정은씨가 그녀를 보고 한껏 반기며 물었다.#@%, 0%·$&*%ㅒ#@!$#*?(선생님, 저 죽을 때도 와주실 거죠?)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왈칵, 울음보를 터트렸다.$#·&@\·%,*&#……(정식이 오빤 좋겠다, 죽..

시를읽다 2025.04.21

쓸어버리고 다시 하기

쓸어버리고 다시 하기입력 : 2024.11.10 20:42 수정 : 2024.11.10. 20:56 이설야 시인  모르겠어 이 밤은 모르겠다 있어야 했을 그 밤을이 밤이 차지하고 있다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그러자 드러나고 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그러자 나는 서두르고 있다그 밤에 사로잡혀이 밤을 어지럽히고 있다 그러자 나는 빗자루를 들고 있다 바닥을 쓸고 있다쓸어버리고 다시 하기 쓸고 있다 쓸어버리고다시 하기 신해욱(1974~)   우리는 무언가를 뒤집어쓴 채로, 잘못 들어선 길을 가고 있다. “있어야 했을 그 밤”을 “이 밤이 차지하고” 있다. 그러자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이 자주 뒤집힌다. 정면이 보이질 않는다. 창문들도 모두 흐릿하다. 다..

시를읽다 2024.11.13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하종오 우리는 우리끼리 하는 말로 태어나면서도 넓디넓은 평야 이루기 위해 태어났제 아무데서나 푸릇푸릇 하늘로 잎 돋아내고 아무데서나 버려져도 흙에 뿌리박았는기라 먼 곳으로 흐르던 물줄기도 찾아보고 날뛰던 송장메뚜기 잠재우기도 하고 농부들이 흘린 땀을 거름 삼기도 하면서 우리야 살기는 함께 살았제 오뉴월 하루볕이 무섭게 익어서 처음으로 서로 안고 부끄러워 고개 숙였는기라 우리야 우리 마음대로 할 것 같으면 총알받이 땅 지뢰밭에 알알이 씨앗으로 묻혔다가 터지면 흩어져 이쪽 저쪽 움돋아 우리나라 평야 이루며 살고 싶었제 우리야 참말로 참말로 참말로 갈라설 수 없어 이 땅에서 흔들리고 있는기라

시를읽다 2022.02.15

이 시대의 사랑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최승자 불러도 삼월에는 주인이 없다 동대문 발치에서 풀잎이 비밀에 젖는다. 늘 그대로의 길목에서 집으로 우리는 익숙하게 빠져들어 세상 밖의 잠 속으로 내려가고 꿈의 깊은 늪 안에서 너희는 부르지만 애인아 사천년 하늘빛이 무거워 우리는 발이 묶인 구름이다. 밤마다 복면한 바람이 우리를 불러내는 이 무렵의 뜨거운 암호를 죽음이 죽음을 따르는 이 시대의 무서운 사랑을 우리는 풀지 못한다.

시를읽다 2022.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