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읽다 19

생의 절반

생의 절반이병률 한 사람을 잊는 데 삼십 년이 걸린다 치면한 사람이 사는 데 육십 년이 걸린다 치면이 생에선 해야 할 일이 별로 없음을 알게 되나니 당신이 살다 간 옷들과 신발들과이불 따위를 다 태웠건만당신의 머리칼이 싹을 틔우더니한 며칠 꽃망울을 맺다가 죽은 걸 보면앞으로 한 삼십 년쯤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아는 데꼬박 삼십 년이 걸린 셈 이러저러 한생의 절반은 홍수이거나 쑥대밭일진대남은 삼십 년 그 세월 동안넋 놓고 앉아만 있을 몸뚱어리는싹 틔우지도 꽃망울을 맺지도 못하고마디 곱은 손발이나 주무를 터 한 사람을 만나는 데 삼십 년이 걸린다 치면한 사람을 잊는 데 삼십 년이 걸린다고 치면컴컴한 얼룩 하나 만들고 지우는 일이 한생의 일일 터 나머지 절반에 죽을 것처럼 도착하더라도있는 힘을..

시를읽다 2025.06.03

시인들 이병률

시인들이병률 1나이 먹어서도 사람들 친근하게 못 맞아주더니못된 놈처럼 자기만 아느라 독기로 밀쳐만 내더니시인이라고 소개하는 이 앞에선마음이 열리고 바다가 보인다 술 한잔 오가며시인들이 원래 그렇죠, 뭐낯선 이의 말 같다 싶은 말에편 하나 끌어들인 기분 되어진탕 마시고 마시다가 바다 앞에 선다 우리 잘하고 있는 거지?처음 본 사인데 말까지 놓으면서길에 핀 꽃대를 걷어차면서도 시시덕거리는시인들의 저녁식사 유난히 쓸쓸해져 걸어 돌아오면 빈집 가득한 바람누군가 왔다 갔나 킁킁거리면늦은 밤 택시 타면서 밤길 잘 가라고 손 흔들던 시인언제 들렀다 간 건지 바다 소리 들리고무릎까지 들어온 갈대밭에 발자국이 찍혀 있다 2어찌 사는가방에 불은 들어오는가쌀은 안 떨어졌는가 살면서 시인에게만 들었던 말나도 따라 시인에게만 ..

시를읽다 2025.06.02

한 시절 잘 살았다

한 시절 잘 살았다송경동 나는 내 시에푸르른 자연에 대한 찬미와 예찬이 빠져 있음을한탄하지 않는다 나는 내 시에부드러운 사랑에 대한 비탄과 환희가 빠져 있음을아쉬워하지 않는다 나는 내 시에저 드넓은 우주에 대한 경배와 경이로움이 빠져 있음을억울해하지 않는다 나는 내 시에빛나는 전망과 역사에 대한 확고한 낙관이 반영되지 못했음을그닥 반성하지 않는다 가령 뜨거운 화덕 앞에서 일하는 사람들가령 뙤약볕과 추위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가령 착취와 차별과 폭력과 모멸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 한 시절 인연이 그들 곁이었으므로그들의 비천하고 비좁은 이야기로 내 시가 가득찼음을 후회하지 않는다 한 시절 인연이충분히 고귀하고 행복한 세상과 절연하고고통만이 전부인 세상과 교통하는 일이었으므로그 절규와 아우성으로부터내 시가 몇 발..

시를읽다 2025.05.30

누가 너더러 시쓰래?

누가 너더러 시쓰래?박노식 여럿이 국밥을 먹는데 잘 안 들어간다특도 아니고 보통인데도 그렇다남들은 술잔은 돌려가면서게걸스럽게 입을 벌리고 농을 던지고물티슈로 얼굴과 목덜미까지 닦아내는데식어가는 국밥 앞에서내 이마엔 식은땀만 송골송골 맺히고개미가 등을 물어뜯는 순간처럼온몸 여기저기서 따끔거린다이들 중에 내 시집을 구매한 자는한 명도 없고, 하지만나는 국밥 한 숟가락을 입에 넣고오물오물 씹으며 속으로 시 한 편씩을 외웟다국밥 한 그릇이 9,000원, 시집 한 권이 9,000원나는 내 길을 가고 있을 뿐인데어째 좀 서러운 느낌이 스멀스멀 콧등으로 올라온다그렇게 시 열편을 외우는 동안이들은 소주 열 병을 비우고국밥 한 그릇을 추가했다반절도 더 남은 국밥 속에서 창백해져 가는내 얼굴을 그대로 묻어둔 채 밖을 보았..

시를읽다 2025.05.29

우리 시대의 시

우리 시대의 시함기석 시청광장에서 처형된 사형수다그녀의 눈동자에 고인 12월의 밤하늘이고목에 걸린 인조 목걸이다 육교 계단에서 추위에 떠는 고아들녹슨 빗속을 최면 상태로 걸어가는 부랑자들이고젖은 불빛이다 낫들이 활보하는 도시거리엔 웃음 없는 무녀의 피가 떠돌고, 우리의 얼굴은죽음이 화인 火印으로 남긴 검은 판화들 잠들면 종이가 자객처럼 내 눈을 베는 소리 들리고고열과 오한 사이에서 나의 펜은눈물을 앓는 새

시를읽다 2025.05.25

한 시절 잘 살았다

한 시절 잘 살았다송경동 나는 내 시에푸르른 자연에 대한 찬미와 예찬이 빠져 있음을한탄하지 않는다 나는 내 시에부드러운 사랑에 대한 비탄과 환희가 빠져 있음을아쉬워하지 않는다 나는 내 시에저 드넓은 우주에 대한 경배와 경이로움이 빠져 있음을억울해하지 않는다 나는 내 시에빛나는 전망과 역사에 대한 확고한 낙관이 반영되지 못했음을그닥 반성하지 않는다 가령 뜨거운 화덕 앞에서 일하는 사람들가령 뙤약볕과 추위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가령 착취와 차별과 폭력과 모멸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 한 시절 인연이 그들 곁이었으므로그들의 비천하고 비좁은 이야기로 내 시가 가득찼음을 후회하지 않는다 한 시절 인연이충분히 고귀하고 행복한 세상과 절연하고고통만이 전부인 세상과 교통하는 일이었으므로그 절규와 아우성으로부터내 시가 몇 ..

시를읽다 2025.05.22

돌이 천둥이다

돌이 천둥이다이재훈 아득히 높은 곳에서 넘친다.우리들의 간원으로 쏟아지는 소리.사람을 뒤덮고소원을 뒤덮고울분을 뒤덮고단단한 죄악을 뒤덮는다.작은 돌이 굴러가는 소리.머릿속이 눈물로 가득하다.새벽마다 삼각산 나무 밑에서방언을 부르짓는 사람들.맨살을 철썩철썩 때리며병을 고치는 사람들.소리는 시간을 앞질러 간다.엄마, 하고 부르면한없이 슬픈 짐승이 된다.아주 오래전돌로 하늘을 내리치면벼락이 치고 천둥이 울렸다.천상의 소리가 대답했다.울 곳이 없어돌 속으로 들어왔다.온몸이 징징 울리는 날들이다.

시를읽다 2025.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