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쓰다 43

수업에 대한 짧은 명상

수업에 대한 짧은 명상 주상태 참 이상한 일이다 수업이 보인 어느 날 아이들이 날개를 달고 교실 속으로 들어온다 내 가슴속에서 비행기를 탄다 정말 이상한 날이다 수업은 언제나 고백 같은 것이었는데 수업은 수 없는 날들의 고독 같았는데 문득 말을 걸어온 햇살 좋은 날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그냥 햇살 뜨거운 날 현관 앞에서 개미를 잡다가 시를 만나고 개미와 아이들과 사랑에 빠지듯 아무것도 들려주지 않지만 아이들은 행복해한다 교실에서 삼겹살을 먹기도 하고 별모양 세모 네모모양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함께 하는 삶을 이야기한다 참 이상한 일이다 비빔밥을 함께 만들어 먹고 비빔밥의 영양가를 논하지 않아도 국어시간이라고 하고 가정시간은 아니라고 말한다 비 내리는 날 운동장에서 첨벙첨벙 무릎까지 물이 차오르고 눈사람을..

시를쓰다 2024.02.12

수선을 떨다

수선을 떨다 주상태 수선은 그냥 수선일 뿐이다 결코 아름답지도 결코 노래하지도 결코 미안해하지 않아야 한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수선 떨지만 그것은 애교 가끔 나의 시간을 갉아먹고 있다 소란스러움 속 자유를 구속하는 부산함은 웃음 아닌 절망을 부르지만 아름다운 수선은 꽃을 피우고 이야기를 낳고 차 한잔을 건네고 자전거를 타고 날게 한다 수선 속에서 시를 먹고 친구도 만나고 아몬드 초콜릿 품 안에서 왈츠를 듣는다 바람 차가운 날 갑자기 수선 떠는 것이 아름답지 않음에 목이 메어오고 가슴은 계절 속에 흩어진다

시를쓰다 2024.02.11

수다를 떨다

수다를 떨다 주상태 막혀있던 혈관이 길을 찾은 것처럼 속이 시원해진다 삶의 잔해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그것이 삶인 것처럼 진지하지도 않고 그것이 꿈인 것처럼 간절하지도 않지만 차 한 잔 건네는 시간 수다는 삶이 된다 길은 사방으로 뚫려있을수록 막히기 쉬운 법 정체되어 있는 순간 박차고 나갈 것 솟구치기에는 너무 위험한 것 수다는 과자 부스러기 수다는 디저트 수다는 휴식 수다는 달콤한 미소 때로는 수다도 삶이 된다 수다를 떨면 삶이 꿈이 된다

시를쓰다 2024.02.1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주상태 내 나이 꺾어지는 즈음에 가끔 하는 말이 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그대는 삶을 속이지 말기를 그대는 삶에 속아 넘어가지 말기를 삶이 그대를 죽일지라도 그대는 삶을 죽이지 말기를 그대는 삶 때문에 죽음을 택하지 말기를 가끔 날아가는 새에게 소리치기도 한다 내 나이 결혼할 즈음에 자주 하는 일이 있었다 손을 잡고 가는 연인들을 보면서 내 삶을 속이면서 혼자 집으로 달려가 라면을 먹은 적이 있다 라면은 몇 그릇째 비워도 머릿속은 비워지지 않은 날 삶이 나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않겠다고 했었다 앞으로만 달리는 나이에도 내 삶은 뒤를 바라보았고 뒤로 돌아가는 나이에는 앞만 보고 달리는 시간이 되었다 삶은 그대를 속일지라도 나는 삶을 속이지 않을 생각이다. 뒤도 돌아보..

시를쓰다 2024.02.09

삶을 토해내다

삶을 토해내다 주상태 차라리 연체된 책처럼 내 삶이 100일쯤 연체되었으면 좋겠다 이른 아침 눈을 뜨지만 자리 보전하며 이불을 박차지 못하는 날에도 “힘 내요.” “축 처진 모습 보기 안좋아.“ 진심으로 느껴지는 말 한마디에 참기름에 말라비틀어진 밥을 비벼 이미 굳어버린 입속으로 밀어 넣는다 지금의 내 삶처럼 모든 것이 10년쯤 토해낼 것도 알지만 삶이란 그렇게 되새김질 하는 것도 안다 꾸역꾸역 삼킨 것은 토해내고 비우고 또 비우고 바닥이 보일 때까지 비우고 나면 내 마음에도 평화가 온다는 것을 너무 늦은 나이라고 하기엔 철없어 보이지만 삶이란 결국 토하는 것 지금까지 가졌던 것 누렸던 것 눈물 나던 것 하나로 모아 토하는 것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나는 것 그 자리에 피는 한 송이 꽃만이 알 수 있는 ..

시를쓰다 2024.02.08

사랑을 위하여

사랑을 위하여 주상태 늦은 나이에 하는 사랑은 안타까움에 눈물젖는 애틋한 사랑은 아닐지라도 가슴 졸이기는 매한가지인 듯 사랑하는 일보다 필요한 게 없을지라도 하루하루 버티는 삶이 소중한지 모를지라도 사랑보다 일이 먼저라는 고민이 있을지라도 사랑은 항상 찾아오는 법 사랑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법 한강을 함께 달릴 여인은 없을지라도 달려야 하고 밥상을 함께 할 사람은 없을지라도 먹어야 하는 나이가 되면 사랑은 강 건너 불구경하는 것으로 잊혀진 계절처럼 마음 졸이기보다 가슴 졸이기보다 처절한 삶의 무게만큼 아프게 짓누르는 것 늦은 나이에도 사랑이 찾아오는 것은 어쩌면 행운 늦은 계절에도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눈물일지도

시를쓰다 2024.02.07

빨래 알아보다

빨래 알아보다 주상태 빨래를 10년 이상 해본 사람은 안다 빨래가 통속에 들어가는 것은 무작위지만 빨래줄에 매달리는 것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너와 나의 선택에 따른다는 것을 무더운 여름날 수건은 어느새 걸레가 되다가도 어깨 위를 맴돌고 나의 어깨는 맞바람의 기세에 꺾이고 만다 힘 빠진 어깨너머 나의 청춘은 촘촘히 매달린 양말 속으로 숨어들어 다소곳한 모습으로 웃는다 나는 가끔 손빨래를 한다 내 인생을 돌아가는 드럼 속에서 잠시라도 붙잡아두고 싶으니까

시를쓰다 2024.02.06

뷔페에 갔다가

뷔페에 갔다가 주상태 처음부터 잘못된 선택이었다 몸을 생각한 것부터가 몸을 망치는 일이었다 맛있는 것을 고민하지 않지만 맛있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곳은 천국이다 바닷속 깊은 곳에서부터 하늘 높은 곳까지 인간의 손이 뻗칠 수 있는 모든 생물 심지어 화석이 된 것까지도 밥상 위에 올라올 수 있기 때문이다 발걸음도 가볍게 무중력 상태로 허느적허느적 마음이 가는 대로 몸도 따라간다 머리로는 몸을 생각하면서 접시 한가득 야채를 가져오지만 몇 번이나 반복되는 불고기, 탕수육, 갈비찜, 육회, 닭다리는 인간도 생각 없을 수 있다는 어차피 인간도 동물이라는 느끼는 대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진리를 깨닫게 하였다 테이블 한쪽에서 당당하게 혹은 거만하게 자리하고 있는 ‘맛있게 먹는 법’은 누구의 기준인가? ‘맛있게 먹..

시를쓰다 2024.02.05

뷔페에 갔다가 2

뷔페에 갔다가 2 주상태 차곡차곡 쌓아야 한다 마음속 그림을 그리고 기억을 남겨야 한다 스마트폰으로 인증 샷 바다로 갈까 하늘로 갈까 아니면 땅 위 세상을 초토화 시킬까 당기는 것은 욕망 천천히 다가가기 위한 시간을 번다 얼음 잔뜩 넣은 음료수는 소화를 도우고 새로운 요리를 기다리는 것은 다시 시작하기 위한 준비 욕망을 억제해야만 차곡차곡 쌓을 수 있다 초밥으로 채우기에는 배가 부르고 밥을 버리기에는 영광굴비가 아쉽고 마늘탕수육은 혼자 먹기엔 씁쓸하여 탄수화물이 없는 메밀로 간다 무즙으로 녹색으로 포장된 메밀로 가서 꼭꼭 눌러 담는다 욕망으로 담고 욕망으로 비운다

시를쓰다 2024.02.04

맑은 하늘을 보면 현기증이 난다

맑은 하늘을 보면 현기증이 난다 주상태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날 맑은 하늘을 보면 현기증이 난다 하늘은 저렇게 맑은데 하늘은 저토록 푸른데 밀려올 비구름이 두려워 하얀 뭉게구름 뒤에 가려진 친구가 생각나 하늘 올려보는 일이 두렵다 나 혼자 하늘을 보는 것 같아 하루종일 허리 구부리며 청소하시는 아주머니의 한 달 봉급과 새벽까지 포장마차에서 밤새는 제자의 어머니가 생각나 도대체 하늘이 있기나 한 건지 새벽이 오기나 하는 건지 새벽이면 깨워달라는 고3딸의 목소리가 조금 귀찮아질 때면 차라리 비라도 내리길 바라본다 신세타령도 좋고 세월타령도 좋고 하늘을 바라보는 일 나를 옥죄는 자유도 잊을 수 있기에

시를쓰다 2024.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