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쓰다

터미널에서 길을 잃다

닭털주 2024. 3. 12. 09:56

터미널에서 길을 잃다

 

주상태

 

 

하필이면 터미널이다

고속으로 간다는 곳에서 길을 잃었다

광주로 갈 수도 있고

부산으로

강릉으로 갈 수도 있는데

서울에 살기에

지하철 교대역에 내려야 2호선을 탈 수 있고

고속터미널역에 내려야 7호선을 탈 수 있고

9호선도 탈 수 있다

9호선을 타고 가는 길은

우리집에서 세상을 만나러 가는 길인데

동작역에 내려야 4호선을 탈 수 있는데

가끔이다

고속터미널역에 내려 2호선을 기다리고

교대역에 내려 3호선을 기다린다

고속으로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터미널로 가야 한다는 무의식을 만나

삶을 내팽겨 친다

흥분하지 말아야 한다

시계를 보지 말아야 한다

한 정거장만 더 가면 이수역에 가고

이수역에선 4호선으로 갈 수 있다

한 정거장만 더 가면 천국으로 갈 수 있고

마음먹고 한 정거장만 더 가서

갈아타는 삶을 살 수만 있으면

천국보다 낫다는 지상에서 살 수도 있다

다시 돌아온 세상에서는

장님보다 낫다는 세상에서는

가끔 느리게 걷기도 한다

에스컬레이트를 뛰어가지 않는다

뛰어가면 위험하다는 에스컬레이트를

먼 산을 바라보며

앞 서 가는 사람을 찾아보지 않으며

한 숨 몰아쉬지 않으며 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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