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106

[말글살이] 어쩌다 보니

[말글살이] 어쩌다 보니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사람들이 묻더라. 지금 하는 일을 어떻게 하게 되었냐고. 뭔가 필연적이고 운명적인 이유를 기대하면서. 이를테면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다거나(풉), 공부에 필요한 끈기를 타고났다거나(우웩) 하는 거 말이다.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식으로 미래를 쫀쫀하게 설계하며 사는 건 거짓말이거나 자기애가 강하거나 겁이 많은 게 아닐까. 중3 때 금오공고를 가려고 했다. 박정희의 전폭적 지원으로 세운 학교라 학비와 기숙사비가 전액 면제였다. 거길 갔다면 노숙한 기능공으로 살고 있겠지(그것도 괜찮았겠다). 담임이 피식 웃으며 일반고를 가랬다. 갔다. 대학도 그랬다. 적당히 국어 선생이나 하며 살려고(미안, 국어 ..

연재칼럼 2023.03.21

[말글살이] ‘김’의 예언

[말글살이] ‘김’의 예언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탱크. 자료사진 말은 시간과 닿아 있다. 경험과 기억이 쌓이기도 하고 오지 않은 미래를 그려 보게도 한다. 정신적 뼈와 살이 되는 말은 육체에 버금간다. 만져지는 말. 우리 딸은 2000년에 태어났다. 미인가 대안학교를 나온 그는 준채식주의자로 살고 있다. 매 순간 행복을 유예하지 않고, 사회가 미리 짜놓은 경쟁의 허들 경기에 불참하고 있다. 아비를 따라 합기도(아이키도) 수련을 하며 틈틈이 노래를 지어 부른다. 한동안 스파게티집 주방에서 종일 설거지 알바를 하더니 몇달 전부터는 채식요리(비건) 식당에 들어가서 고단한 노동자의 삶을 시작했다. 요즘 그는 틈나는 대로 운다. ‘김’ 때문이다. 얇고 까무잡잡한 ‘..

연재칼럼 2023.03.14

부모 돈 믿고, 학폭 휘두른 괴물 ‘글로리 연진’

부모 돈 믿고, 학폭 휘두른 괴물 ‘글로리 연진’ [윤석진의 캐릭터 세상] 박연진 넷플릭스 제공 “보살님이 이름에 ‘이응’ 들어간 애들은 살이 끼니까 피하라고 했어, 안 했어?” 엄마가 학교폭력 가해자로 경찰 조사를 받고 온 고등학생 딸을 매섭게 다그친다. 부정한 기운을 막는다며 굵은소금을 딸의 몸에 세차게 뿌리기도 한다. 보살(무당)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의식한 딸은 연신 머리를 조아린다. 딸의 폭력적 성향이 아니라, 이름에 ‘이응 들어간 애’ 때문에 경찰 조사를 받았다는 엄마의 무속적 확신이 예사롭지 않다. 마치 한국사회의 단면을 풍자하는 듯하다.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복수에 나서는 넷플릭스 드라마 의 한 장면인데, 현실감이 차고 넘친다. 학교폭력은 친구들끼리 때리고 맞을 수도 있..

연재칼럼 2023.03.11

[말글살이] “김”

[말글살이] “김” 올겨울 들어 가장 낮은 기온을 기록한 1월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사거리에서 시민들의 입김이 뿌옇게 보이고 있다. 김명진 기자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우리 딸은 아빠를 잘 이용한다. 밥을 푸러 일어나 두세 걸음을 옮길라치면 등 뒤에서 ‘아빠, 일어난 김에 물 한잔만!’. 안 갖다줄 수가 없다. 매번 당하다 보니 ‘저 아이는 아빠를 잘 써먹는군’ 하며 투덜거리게 된다. 중요한 건 때를 잘 맞추는 것. 늦지도 빠르지도 않아야 한다. 잠자코 기다리고 있다가 누군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면 먹이를 낚아채는 야수처럼 세 치 혀를 휘둘러 자기 할 일을 슬쩍 얹는다. 밥을 하면 밥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물을 끓이면 주전자에서 김이 뿜어져 나온다. 추운 ..

연재칼럼 2023.03.11

[말글살이] 울면서 말하기

[말글살이] 울면서 말하기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울면서 말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부럽다. 나는 울면서 말을 하지 못한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입이 실룩거리며 울음이 목구멍에 닿으면, 하고 싶던 말을 도무지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다. 첫소리부터 컥, 하는 울음소리에 눌려 뭉개진다. 울면서 뱉은 말을 꼽아보면 ‘엄마, 아버지, 어휴, 이게 뭐야, 어떡해.’ 정도. 온전한 문장이 없다. 그러니 울면서 ‘조곤조곤’ 말하는 사람이 부러울 수밖에. 울음을 배경음악으로 깔고 하는 말이니 듣는 이는 어찌 녹아내리지 않겠는가. 아직 동지를 찾지 못했다. 우는 사람한테 가서 ‘할 말이 있는데 우느라 못 하는 거냐’고 묻는 건 너무 냉정하다. 말년에 ‘말없이’ 수시로 울먹거렸던 아버지가 제일 ..

연재칼럼 2023.03.03

‘다음 소희’에 숨은 문법 [말글살이]

‘다음 소희’에 숨은 문법 [말글살이] 영화 스틸컷.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제공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특성화고 3학년 소희는 콜센터로 현장실습을 나가 인터넷 해지를 원하는 고객을 ‘방어(방해? 저지?)’하는 부서에서 일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영화는 청소년 노동자의 죽음이 누구의 책임인지 탐색해 올라간다. 하지만 모든 걸 숫자로 치환하는 세상에서는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숫자가 책임자다. 사회를 ‘돌아가게 하고’ 사람을 ‘작동’시키는 스위치는 숫자다. 이제 우리는 사랑에 가슴 두근거리지 않는다. 성과지표 합격률 취업률 가입률 지지율 인상률 연봉 같은 것들에 가슴이 뛴다. 영화의 매력은 제목에서 나온다. 피해자를 내세우고 ‘그다음 피해자는 누구냐?’며 다그치는 제목이라..

연재칼럼 2023.02.25

[말글살이] 말하는 입

[말글살이] 말하는 입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입이 하는 일이 적지 않다. 먹기, 말하기, 노래하기, 숨쉬기, 사랑하기, 토하기. 물어뜯기도! 혼자서는 할 수 없고 순간순간 다른 신체 기관과 연결되어야 한다. 입의 이런 역할은 단어를 만들 때도 발자국처럼 따라다닌다. ‘입요기’ ‘입가심’ ‘입걱정’ ‘입덧’ 같은 말은 ‘먹는 입’과 관련이 있다. ‘입바람’ ‘입방귀’는 ‘숨 쉬는 입’과 연결된다. ‘입맞춤’은 당연히 ‘사랑하는 입’이겠고. 인간은 말하는 기계인지라, ‘입’이 들어간 단어에는 ‘말하기’와 관련된 게 많다. 입단속이야말로 평화의 지름길이란 마음으로 ‘말하는 입’ 얘기를 중얼거린다. 아침 댓바람부터 입담 센 몽룡과 입놀림 가벼운 춘향이 입방아를 찧는다. 서로 꿍짝이 맞..

연재칼럼 2023.02.22

[김탁환 칼럼] 그런 사람 또 있습니다

[김탁환 칼럼] 그런 사람 또 있습니다 김탁환 | 소설가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냐고, 지나치게 꾸민 것 아니냐는 의심이 뒤따를 때가 있다. 속세의 상식과 기준을 뛰어넘는 삶이기에, 믿기 어려운 것이다. 영웅이니 협객이니 하는 상찬은 답이 아니다. 그 사람이 어디서부터 출발해 어떤 어려움을 겪었고 무슨 고민을 거듭하여 홀로 그곳까지 나아갔는가를 밝혀야 설득력이 있다. 이 어려운 작업에 도전한 다큐멘터리 두편과 더불어 새해를 맞았다. 먼저 다큐멘터리 를 보았다. 황윤 감독이 새만금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다는 소식을 듣긴 했다. 2010년 4월27일 새만금 방조제가 준공됐고, 새만금 간척을 놓고 첨예하게 맞섰던 사람들도 대부분 떠났을 텐데, 할 만한 이야기가 무엇이 남았을까 궁금했다. 제목 그대로..

연재칼럼 2023.02.22

[말글살이] 말의 세대 차

[말글살이] 말의 세대 차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말의 세대 차를 걱정하는 사람을 자주 만난다. ‘못 알아듣겠다.’ ‘이러다가 소통이 안 될까봐 걱정이다.’ ‘세대 차를 줄이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걱정도 팔자다. 노력하지 말라. 가끔은 뭘 하는 것보다 안 하는 게 나을 때가 있다. 세대 차를 줄이려는 노력은 허황되고 부질없다. 세대 차가 없는 말의 세계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노화 저지’(안티에이징)가 시대적 과제라지만, 가는 세월 그 누가 잡을 수가 있겠나. 기성세대는 버릇처럼 젊은이들의 말을 달가워하지 않지만, 줄임말이나 신조어가 젊은이들의 전유물이기만 한 건 아니다. 새로운 말은 세대를 불문하고 어디서든 만들어진다. 누가 쓰느냐에 따라 평가를 ..

연재칼럼 2023.02.19

[말글살이] 국가의 목소리

[말글살이] 국가의 목소리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지난 4일, 서울 시청 주변은 백남준의 비디오아트 전시장 같았다. 여러 모니터에 시시각각 다른 영상이 나오듯이, 집회와 맞불집회가 동시다발로 열렸다. 목소리는 뒤엉키고 시선은 흩어졌다. 그 사이를 헤집고 파고드는 말이 있었다. 10·29 이태원참사 100일 추모대회 참가자들을 향한 경찰의 선무방송. 유일하게 들은 국가기관의 말이니 그 일부를 기록해 둔다. “… 여러분은 해산 명령에도 불구하고 해산하고 있지 않습니다. … 여러분, 여러분은 신고한 집회의 장소와 방법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 계속하여 불법 집회 시위를 진행하고 있고, 이러한 질서 문란한 상태에 대해서 주최 측에서 질서 유지와 질서 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습니다..

연재칼럼 2023.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