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129

[김탁환 칼럼] 그런 사람 또 있습니다

[김탁환 칼럼] 그런 사람 또 있습니다 김탁환 | 소설가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냐고, 지나치게 꾸민 것 아니냐는 의심이 뒤따를 때가 있다. 속세의 상식과 기준을 뛰어넘는 삶이기에, 믿기 어려운 것이다. 영웅이니 협객이니 하는 상찬은 답이 아니다. 그 사람이 어디서부터 출발해 어떤 어려움을 겪었고 무슨 고민을 거듭하여 홀로 그곳까지 나아갔는가를 밝혀야 설득력이 있다. 이 어려운 작업에 도전한 다큐멘터리 두편과 더불어 새해를 맞았다. 먼저 다큐멘터리 를 보았다. 황윤 감독이 새만금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다는 소식을 듣긴 했다. 2010년 4월27일 새만금 방조제가 준공됐고, 새만금 간척을 놓고 첨예하게 맞섰던 사람들도 대부분 떠났을 텐데, 할 만한 이야기가 무엇이 남았을까 궁금했다. 제목 그대로..

연재칼럼 2023.02.22

[말글살이] 말의 세대 차

[말글살이] 말의 세대 차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말의 세대 차를 걱정하는 사람을 자주 만난다. ‘못 알아듣겠다.’ ‘이러다가 소통이 안 될까봐 걱정이다.’ ‘세대 차를 줄이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걱정도 팔자다. 노력하지 말라. 가끔은 뭘 하는 것보다 안 하는 게 나을 때가 있다. 세대 차를 줄이려는 노력은 허황되고 부질없다. 세대 차가 없는 말의 세계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노화 저지’(안티에이징)가 시대적 과제라지만, 가는 세월 그 누가 잡을 수가 있겠나. 기성세대는 버릇처럼 젊은이들의 말을 달가워하지 않지만, 줄임말이나 신조어가 젊은이들의 전유물이기만 한 건 아니다. 새로운 말은 세대를 불문하고 어디서든 만들어진다. 누가 쓰느냐에 따라 평가를 ..

연재칼럼 2023.02.19

[말글살이] 국가의 목소리

[말글살이] 국가의 목소리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지난 4일, 서울 시청 주변은 백남준의 비디오아트 전시장 같았다. 여러 모니터에 시시각각 다른 영상이 나오듯이, 집회와 맞불집회가 동시다발로 열렸다. 목소리는 뒤엉키고 시선은 흩어졌다. 그 사이를 헤집고 파고드는 말이 있었다. 10·29 이태원참사 100일 추모대회 참가자들을 향한 경찰의 선무방송. 유일하게 들은 국가기관의 말이니 그 일부를 기록해 둔다. “… 여러분은 해산 명령에도 불구하고 해산하고 있지 않습니다. … 여러분, 여러분은 신고한 집회의 장소와 방법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 계속하여 불법 집회 시위를 진행하고 있고, 이러한 질서 문란한 상태에 대해서 주최 측에서 질서 유지와 질서 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습니다..

연재칼럼 2023.02.19

[말글살이] ○○노조

[말글살이] ○○노조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굳은살은 감각을 무디게 만든다. 말이 굳으면 대상을 별생각 없이 일정한 이미지로 자동 해석하게 한다. 한국 사회의 반노동 반노조 정서는 말 속에 뿌리 깊이 박혀 있다. ‘노조’라는 단어를 읊조려 보라. 머릿속에 어떤 이미지들이 떠오르나? ‘머리띠, 구호, 삭발, 파업’이 아닌, ‘친구, 맞잡은 손, 비를 피할 큰 우산’ 같은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노조’의 빈자리를 채우는 말을 떠올려 보라. 예전엔 ‘어용노조, 민주노조’ 정도였다면, 지금은 ‘강성노조, 귀족노조’라는 말이 떠오른다. 최근엔 ‘부패노조’라는 표현도 등장. 진실을 감추고 선입견을 심어주는 데 성공한 말들이다. ‘귀족노조’라는 말은 의미가 이중적인 만큼 효과가 좋다. 이..

연재칼럼 2023.02.19

길 위의 마음을 거듭 헤아린다면 [김탁환 칼럼]

길 위의 마음을 거듭 헤아린다면 [김탁환 칼럼] 김탁환 | 소설가 섬진강은 두꺼비와 인연이 깊다. 강으로 몰려오는 왜구를 두꺼비들이 일제히 울어 내쫓았다는 전설이 ‘두꺼비 섬’(蟾)에 얹혀 전한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두꺼비가 산란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는 때가 이즈음이다. 두꺼비가 도로에서 가장 많이 목숨을 잃는 때이기도 하다. 첫 단추를 잘못 채워 단추를 모두 푼 경험이 있을 것이다. 재난의 역사를 살펴보면, 추모와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이 가지런하게 진행되기보단 뒤섞인 채 우왕좌왕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혼란스러울 때는 길 위에서 떨고 선 목숨부터 잊지 않고 먼저 품어야 한다. 서울시는 지난 9일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에 의뢰해 ‘이태원 참사 분향소 설치 찬반 여론조사’를 실시하고 이튿날 결과를 ..

연재칼럼 2023.02.15

[말글살이] 남친과 남사친

[말글살이] 남친과 남사친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말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감정을 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처음엔 얌전히 화를 내던 사람이 자기 말에 취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걸 본 적이 있을 거다. “보고 싶다”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이 더 보고 싶어지는 경우도 많다. 말은 감정을 격동시킨다. 들쑤신다. 안 믿기겠지만, ‘사랑’이라는 말 속에는 ‘우정’의 요소가 들어 있다. 사랑의 감정 속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일이 잘되기를 바라고 그에게 더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애인은 친구이자 동지이다. 사랑 속에 우정이 들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남자친구, 여자친구’란 말이다. 맹랑하게도 이 말은 그냥 친구 사이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뜻한다. 사..

연재칼럼 2023.02.13

[말글살이] ‘통일’의 반대말

[말글살이] ‘통일’의 반대말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낮’의 반대는 ‘밤’, ‘살다’의 반대는 ‘죽다’. 반대말은 어떤 상태의 양쪽 끄트머리로 우리의 시선을 잡아당긴다. 그 사이에 있는 우여곡절은 놓치게 하지. ‘깨끗하다-더럽다’ ‘따뜻하다-차갑다’ ‘다정하다-무정하다’처럼 사회문화적인 평가가 담긴 말은 한쪽으로 마음이 쏠리게 하지. ‘통일’의 반대말은 뭘까? ‘분단’이나 ‘분열’쯤 될 듯. 분단, 분열은 ‘쪼개지고 갈라졌다’는 부정적 감정을, 통일은 ‘하나되고 일치한다’는 긍정적 감정을 일으킨다. ‘우리의 소원’이기도 하니, 거역할 수 없는 지상명령이다. 통일만 된다면, 긴장과 대립은 사라지고 상처는 치유되며 온 세상에 일치와 단결의 함성이 드높아질 거라는 유토피아적 희망을 ..

연재칼럼 2023.01.23

[김탁환 칼럼] 가로지르며 파종을 생각하다

[김탁환 칼럼] 가로지르며 파종을 생각하다 김탁환 | 소설가 봄에 손 모내기를 했던 유치원생들이 추수체험을 하려고 다시 섬진강 들녘으로 왔다. 안전사고를 막기 위해 교사와 농부들이 미리 모여 회의를 했다. 낫으로 벼를 베고 홀태로 탈곡하고 키를 좌우로 흔들고 상하로 까불어 알곡과 쭉정이를 나눴다. 어린이들은 자신들이 심었던 모가 수백개 알곡이 달린 벼로 자라난 것을 직접 보고 만지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볍씨를 주워들고 봄이 오면 제일 먼저 와서 심겠다고 했다. 추수할 때 파종을 생각하는 어린이들이었다. 유치원생들을 보내고 나서, 나흘 내내 본격적인 추수를 했다. 내가 일한 곳은 농부과학자 이동현 박사가 벼 품종 연구를 위해 가꾼 논이다. 파종부터 탈곡까지 농기계를 전혀 쓰지 않아야, 100여개 품종이..

연재칼럼 2023.01.23

[홍은전 칼럼] 잘못된 만남

[홍은전 칼럼] 잘못된 만남 홍은전 | 작가·인권 동물권 기록활동가 요즘 장애인운동을 하는 비장애인 활동가들을 인터뷰한다. 장애인운동은 비장애 중심 사회가 가리고 지우는 장애인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운동이므로, 이 과정에서 비장애인은 역설적이고 필연적으로 가려지고 지워진다. 그들은 무대 위에 있을 때조차 쪼그리고 앉은 채 장애인에게 마이크를 대주거나 뒤에서 우산을 드는 사람들이다. 장애인도 아니면서 장애인을 차별하는 세상을 매일 새삼스럽게 통탄하느라 이번 생을 다 쓰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이 운동을 왜 하는지, 왜 떠나지 못했는지 같은 질문을 하며 올여름을 보냈다. 동경하는 활동가 대구 질라라비장애인야학 교장 조민제에게 묻자 그는 심플하게 대답했다. “선배를 잘못 만나서요.” 조민제는 2003년 대구대학..

연재칼럼 2023.01.17

[말글살이] ‘-도’와 나머지

[말글살이] ‘-도’와 나머지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사람은 꽉 짜인 논리보다는 상황에 따라 끝없이 바뀌는 경험으로 세상을 익힌다. 경험은 수많은 사례를 만난다는 뜻. ‘어머니’라는 말도 ‘여성’, ‘성인’, ‘부모’, ‘자식’과 같은 논리적 속성을 합산한 필요충분조건을 통해 익히는 게 아니다. 젖을 주고 기저귀를 갈아주는 그분과 옆집에서 본 비슷한 분,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어른, 어떤 것의 시초 등을 보면서 눈덩이 굴리듯 ‘어머니’의 뜻을 넓혀 나간다. 낳고 길러준 어머니, 낳기만 하고 기르지는 않은 어머니, 낳지는 않았지만 길러준 어머니, 친밀감의 표시로 타인에게 던지는 어머니, 음악의 어머니,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등등. 전형적인 어머니에서 주변적인 어머니로 동심원을 그..

연재칼럼 2023.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