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106

[말글살이] 언어공동체

[말글살이] 언어공동체 김진해 ㅣ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언어공동체란 뭔가? 쉽게 쓰지만 답하긴 어렵다. 사전엔 ‘같은 말을 쓰면서 함께 살아가는 사회 집단’이라고 눙치려 한다. 도대체 ‘같은 말(한국어)’이란 뭔가? 분명 강원도 말과 제주도 말이 다르고, 10대의 말과 80대의 말이 다르고, 아나운서의 말과 농부의 말이 다른데. 사람마다 쓰는 어휘도 다르고 말투도 다른데. 같은 사람이라도 시간과 장소, 관계, 기분에 따라 쓰는 말이 다른데. 그런데도 우리는 ‘같은 말’을 쓰는 공동체인가? 그렇다면 이 말은 구체적인 언어사용보다는 추상적인 언어질서, 규범, 규칙 같은 걸 뜻하는 듯하다. 이 추상적인 언어질서는 당연히 ‘한국 정신’처럼 한국인의 정서와 문화를 가장 잘 담는 그릇이다. 세대와 ..

연재칼럼 2022.02.06

[말글살이] 풀어쓰기

[말글살이] 풀어쓰기 김진해ㅣ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영어처럼 한국어도 옆으로 풀어쓰면 어떨까. 낯설겠지만 아래 시를 읽어보자. ㅈㅜㄱㄴㅡㄴ ㄴㅏㄹㄲㅏㅈㅣ ㅎㅏㄴㅡㄹㅇㅡㄹ ㅇㅜㄹㅓㄹㅓ ㅎㅏㄴ ㅈㅓㅁ ㅂㅜㄲㅡㄹㅓㅁㅇㅣ ㅇㅓㅄㄱㅣㄹㅡㄹ (윤동주, ‘서시’). 나는 지금도 지인들한테 보내는 이메일에 ‘ㄱㅣㅁㅈㅣㄴㅎㅐ’라 쓰곤 한다. 재미있기도 하지만 음소문자인 한글의 또 다른 표기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풀어쓰면 좋은 점이 있다. 영어 필기체처럼 글씨를 더 빨리 쓸 수 있고, 컴퓨터 글자체(폰트) 개발에도 시간을 ‘엄청’ 줄일 수 있다. ‘걎, 걞, 겏’이나 ‘뷁’처럼, 한글로 만들 수 있는 음절수는 무려 1만1172자이다.(한자에 이어 세계 2위!) 이 중에서 흔히 쓰는 음절 2350자는..

연재칼럼 2022.02.05

[말글살이] 인과와 편향

[말글살이] 인과와 편향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사람들은 어떤 일이 벌어지면 자꾸 그 원인을 따지는 버릇이 있다. 국이 짜면 ‘국이 짜구나’라 안 하고 소금을 너무 많이 쳤나 보군, 눈이 작으면 ‘눈이 작구나’라 하지 않고 다 아빠 때문이라 한다. 재판은 원인 찾기 경연장이다. 원인은 무한하다. 당구공을 구르게 한 건 큐대이지만 팔근육을 앞뒤로 움직이지 않았다면 큐대가 공을 칠 수 없었을 것이다. 팔은 뇌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을 테고. 대뇌피질을 움직이게 한 건 뭘꼬? ‘쌀 한 톨에 우주가 담겨 있다’는 얘기도 존재에 연관된 수많은 원인과 조건을 말하는 거겠지. 원인 찾기에는 사회 문화와 정치 성향이 반영된다. 보통은 개인과 환경 중 하나에 몰아주기를 한다. 폭식의 원인은 운동은..

연재칼럼 2022.02.04

[말글살이] 오촌 아재 -김진해 ㅣ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말글살이] 오촌 아재 김진해 ㅣ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옛 시골에선 겨울에 산문이 열린다. 이웃들이 함께 산에 올라 땔감을 한다. 하지만 어찌 한날한시에 다 모일 수 있으랴. 노가다판에 가 있기도 하고 낫질하다 손가락이 상해 못 나오기도 하지. 으스름 저녁 이고지고 온 나무를 마당에 부리고 나면, 분배가 문제. 식구 수에 따라 나누자니 저 집은 한 사람밖에 안 나왔다고 투덜. 똑같이 나누자니 저 집 나무는 짱짱한데, 내 건 다 썩어 호로록 타버리겠다고 씨부렁. 거기에 오촌 아재 등장. ‘오촌’은 ‘적당한 거리감’의 상징. 막걸리잔 부딪치며 ‘행님 나무가 짱짱하니 고 정도로 참으쇼.’ ‘저 동상네 아부지가 션찮으니 몸이라도 지지게 좀 더 줍시다.’ 한다. 다툼은 쪼잔한 데서 시작된다. 우리..

연재칼럼 2022.02.03

[말글살이] 피장파장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말글살이] 피장파장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자고 일어나면 이불을 개야지!” “아빠도 안 개더만.” “일찍 좀 자라!” “아빠도 새벽에 자더만.” 사춘기의 반항심은 ‘어른’의 모순을 목격하면서 시작된다. 아이가 성숙의 첫발을 내딛는 순간은 완벽한 세계였던 부모가 실은 겉과 속이 다르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모순덩어리임을 눈치챌 때다. 그 순간 무적의 논리 하나가 혀끝에 장착되는데, 바로 피장파장의 검이다! “당신도 마찬가지야.” 이 검을 제대로 휘두른 이는 예수다. 그는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돌로 쳐 죽여야 하지 않느냐는 율법주의자들의 다그침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고 되받아친다. 이 말에 움찔한 사람들은 돌을 내려놓고 흩어진다. 범법자들에게는 고개..

연재칼럼 2022.02.02

[말글살이] 안녕히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말글살이] 안녕히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상상하는 인간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끝을 가늠할 수도 가닿을 수도 없구나. 바퀴 없는 자전거 타기. 달의 뒷면에 앉아 도시락 까먹기. 우리 아들의 아들로 태어나기. 배낭 메고 부산에서 출발해 강릉, 속초, 원산, 청진, 두만강 건너 블라디보스토크 지나 모스크바까지 가기. 죽음의 길은 날아가는 걸까 걸어가는 걸까. 그러다 문득 현실로 돌아오면 새삼 알게 되지. 일상은 이다지도 진부하구나. 이토록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럴 때면 ‘안녕히’ 같은 말을 곱씹는다. ‘아무 탈이나 걱정 없이 편안하게’라는 뜻이렷다. ‘편안하게’ 할 수 있는 게 한둘이 아닐 텐데, ‘안녕히’는 어떤 말과 함께 쓰이나? (1분 안에 열 개를 생각해 낸다면 부디 당신이 ..

연재칼럼 2022.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