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106

[말글살이] ○○노조

[말글살이] ○○노조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굳은살은 감각을 무디게 만든다. 말이 굳으면 대상을 별생각 없이 일정한 이미지로 자동 해석하게 한다. 한국 사회의 반노동 반노조 정서는 말 속에 뿌리 깊이 박혀 있다. ‘노조’라는 단어를 읊조려 보라. 머릿속에 어떤 이미지들이 떠오르나? ‘머리띠, 구호, 삭발, 파업’이 아닌, ‘친구, 맞잡은 손, 비를 피할 큰 우산’ 같은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노조’의 빈자리를 채우는 말을 떠올려 보라. 예전엔 ‘어용노조, 민주노조’ 정도였다면, 지금은 ‘강성노조, 귀족노조’라는 말이 떠오른다. 최근엔 ‘부패노조’라는 표현도 등장. 진실을 감추고 선입견을 심어주는 데 성공한 말들이다. ‘귀족노조’라는 말은 의미가 이중적인 만큼 효과가 좋다. 이..

연재칼럼 2023.02.19

길 위의 마음을 거듭 헤아린다면 [김탁환 칼럼]

길 위의 마음을 거듭 헤아린다면 [김탁환 칼럼] 김탁환 | 소설가 섬진강은 두꺼비와 인연이 깊다. 강으로 몰려오는 왜구를 두꺼비들이 일제히 울어 내쫓았다는 전설이 ‘두꺼비 섬’(蟾)에 얹혀 전한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두꺼비가 산란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는 때가 이즈음이다. 두꺼비가 도로에서 가장 많이 목숨을 잃는 때이기도 하다. 첫 단추를 잘못 채워 단추를 모두 푼 경험이 있을 것이다. 재난의 역사를 살펴보면, 추모와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이 가지런하게 진행되기보단 뒤섞인 채 우왕좌왕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혼란스러울 때는 길 위에서 떨고 선 목숨부터 잊지 않고 먼저 품어야 한다. 서울시는 지난 9일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에 의뢰해 ‘이태원 참사 분향소 설치 찬반 여론조사’를 실시하고 이튿날 결과를 ..

연재칼럼 2023.02.15

[말글살이] 남친과 남사친

[말글살이] 남친과 남사친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말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감정을 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처음엔 얌전히 화를 내던 사람이 자기 말에 취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걸 본 적이 있을 거다. “보고 싶다”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이 더 보고 싶어지는 경우도 많다. 말은 감정을 격동시킨다. 들쑤신다. 안 믿기겠지만, ‘사랑’이라는 말 속에는 ‘우정’의 요소가 들어 있다. 사랑의 감정 속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일이 잘되기를 바라고 그에게 더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애인은 친구이자 동지이다. 사랑 속에 우정이 들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남자친구, 여자친구’란 말이다. 맹랑하게도 이 말은 그냥 친구 사이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뜻한다. 사..

연재칼럼 2023.02.13

[말글살이] ‘통일’의 반대말

[말글살이] ‘통일’의 반대말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낮’의 반대는 ‘밤’, ‘살다’의 반대는 ‘죽다’. 반대말은 어떤 상태의 양쪽 끄트머리로 우리의 시선을 잡아당긴다. 그 사이에 있는 우여곡절은 놓치게 하지. ‘깨끗하다-더럽다’ ‘따뜻하다-차갑다’ ‘다정하다-무정하다’처럼 사회문화적인 평가가 담긴 말은 한쪽으로 마음이 쏠리게 하지. ‘통일’의 반대말은 뭘까? ‘분단’이나 ‘분열’쯤 될 듯. 분단, 분열은 ‘쪼개지고 갈라졌다’는 부정적 감정을, 통일은 ‘하나되고 일치한다’는 긍정적 감정을 일으킨다. ‘우리의 소원’이기도 하니, 거역할 수 없는 지상명령이다. 통일만 된다면, 긴장과 대립은 사라지고 상처는 치유되며 온 세상에 일치와 단결의 함성이 드높아질 거라는 유토피아적 희망을 ..

연재칼럼 2023.01.23

[김탁환 칼럼] 가로지르며 파종을 생각하다

[김탁환 칼럼] 가로지르며 파종을 생각하다 김탁환 | 소설가 봄에 손 모내기를 했던 유치원생들이 추수체험을 하려고 다시 섬진강 들녘으로 왔다. 안전사고를 막기 위해 교사와 농부들이 미리 모여 회의를 했다. 낫으로 벼를 베고 홀태로 탈곡하고 키를 좌우로 흔들고 상하로 까불어 알곡과 쭉정이를 나눴다. 어린이들은 자신들이 심었던 모가 수백개 알곡이 달린 벼로 자라난 것을 직접 보고 만지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볍씨를 주워들고 봄이 오면 제일 먼저 와서 심겠다고 했다. 추수할 때 파종을 생각하는 어린이들이었다. 유치원생들을 보내고 나서, 나흘 내내 본격적인 추수를 했다. 내가 일한 곳은 농부과학자 이동현 박사가 벼 품종 연구를 위해 가꾼 논이다. 파종부터 탈곡까지 농기계를 전혀 쓰지 않아야, 100여개 품종이..

연재칼럼 2023.01.23

[홍은전 칼럼] 잘못된 만남

[홍은전 칼럼] 잘못된 만남 홍은전 | 작가·인권 동물권 기록활동가 요즘 장애인운동을 하는 비장애인 활동가들을 인터뷰한다. 장애인운동은 비장애 중심 사회가 가리고 지우는 장애인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운동이므로, 이 과정에서 비장애인은 역설적이고 필연적으로 가려지고 지워진다. 그들은 무대 위에 있을 때조차 쪼그리고 앉은 채 장애인에게 마이크를 대주거나 뒤에서 우산을 드는 사람들이다. 장애인도 아니면서 장애인을 차별하는 세상을 매일 새삼스럽게 통탄하느라 이번 생을 다 쓰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이 운동을 왜 하는지, 왜 떠나지 못했는지 같은 질문을 하며 올여름을 보냈다. 동경하는 활동가 대구 질라라비장애인야학 교장 조민제에게 묻자 그는 심플하게 대답했다. “선배를 잘못 만나서요.” 조민제는 2003년 대구대학..

연재칼럼 2023.01.17

[말글살이] ‘-도’와 나머지

[말글살이] ‘-도’와 나머지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사람은 꽉 짜인 논리보다는 상황에 따라 끝없이 바뀌는 경험으로 세상을 익힌다. 경험은 수많은 사례를 만난다는 뜻. ‘어머니’라는 말도 ‘여성’, ‘성인’, ‘부모’, ‘자식’과 같은 논리적 속성을 합산한 필요충분조건을 통해 익히는 게 아니다. 젖을 주고 기저귀를 갈아주는 그분과 옆집에서 본 비슷한 분,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어른, 어떤 것의 시초 등을 보면서 눈덩이 굴리듯 ‘어머니’의 뜻을 넓혀 나간다. 낳고 길러준 어머니, 낳기만 하고 기르지는 않은 어머니, 낳지는 않았지만 길러준 어머니, 친밀감의 표시로 타인에게 던지는 어머니, 음악의 어머니,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등등. 전형적인 어머니에서 주변적인 어머니로 동심원을 그..

연재칼럼 2023.01.04

[말글살이] 다섯 살까지

[말글살이] 다섯 살까지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이게 뭐야?” 어린아이가 가장 자주 하는 질문이자, 삶에서 가장 놀라운 발견의 시기를 겪고 있음을 보여주는 질문이다. 즉, 세상 모든 것에 ‘이름’이 있다는 것. 이 이름(명칭)은 어른들이 생각하듯 대상의 본질과 관계없는 자의적 ‘기호’가 아니다. 아이에게 ‘이름’은 처음부터 대상이 갖고 있던 특성이다. 마치 빨간 껍질 속에 하얗고 단단한 과육이 들어 있고 아삭아삭 씹히며 새콤달콤한 맛을 내는 것이 사과의 특성이듯이, ‘사과’라는 이름도 그 대상의 본래적인 특성이다. 그래서 끝없이 묻는다. ‘이게 뭐야?’ 네댓 살이 되면 질문이 바뀐다. ‘엄마는 왜 나보다 나이가 많아? 나무는 왜 흔들려? 해는 왜 저녁엔 안 보여?’ 자신을 둘러..

연재칼럼 2022.12.24

[말글살이] 위협하는 기록

[말글살이] 위협하는 기록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총을 내려놓는다고 저절로 평화가 오지 않는다. 회초리를 내려놓는다고 인권이 넘치고 행복한 학교가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수업 방해, 비아냥과 모욕, 동영상 촬영과 유포가 난무했다. 학생은 선생을 욕하고 놀릴 수 있지만, 선생이 그러면 아동학대다. 학생이 무슨 짓을 해도 당장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교사들은 무기력증에 빠져 있다고 하소연한다(얼마 전 국회 교육위원회에서는 교장에게만 주던 생활지도권을 교사에게도 부여하는 법안을 의결했다). 11월30일 교육부 주최로 ‘학교 교육활동 보호 강화 방안 마련을 위한 공청회’가 열렸다. 교육부 시안에는 중대한 교권 침해를 범한 학생은 학교생활기록부(생기부)에 기록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연재칼럼 2022.12.04

‘웃기고 있네’와 ‘웃기고 자빠졌네’

‘웃기고 있네’와 ‘웃기고 자빠졌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말에는 시간의 흐름이 담긴다. 일이 벌어지기 전의 징조가 있고 일이 시작돼 진행되다가 이내 마무리되는 흐름. ‘의자에 앉으려고 한다’라는 말이 앉는 동작의 의도나 조짐이라면, ‘앉고 있다’는 앉는 동작을 계속하는 상황을 나타낸다. ‘앉아 있다’는 앉고 나서 그대로 있을 때 쓰겠지. 보다시피, ‘~고 있다’는 어떤 사건이 계속 이어지는 걸 표시한다. ‘울고 있다’, ‘걷고 있다’.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파악한 시간의 조각 위에 감정을 싣는 장치가 있다. 사건 위에 분노의 감정이나 빈정거림의 정서를 보탤 수 있다. 대표적으로 ‘~고 자빠졌다’. 눈앞에 벌어지는 일을 꼴사납다는 시선으로 지켜본다. 아무래도 앞으로 엎..

연재칼럼 2022.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