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106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시험 공화국’의 짙은 그늘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시험 공화국’의 짙은 그늘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우리는 대개 ‘선진국’이라는 용어를 구미권 국가들에 사용하곤 하지만, 사실 산업혁명 이전 세계에서는 동아시아야말로 선진권이었다. 종이나 금속활자, 화약, 그리고 로켓과 지폐 등 주요 발명품들을 독점했던 것부터 그 선진성의 한 측면이었다. 그런데 동아시아의 선진성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한나라에서 기원전 134년부터 시작되고, 신라가 788년에 독서삼품과의 형태로 수용한 시험을 통한 공무원 등용 제도는 그 당시 세계의 어느 다른 지역에서도 시행되지 않았다. 유라시아의 다른 제국인 비잔티움이나 아랍 칼리파국, 아니면 사산왕조 등에서 공무원 등용은 주로 집안의 신분이나 인맥으로 이뤄졌지만, 동아시아는 일찌감치 보다..

연재칼럼 2023.05.06

[말글살이] 평어 쓰기, 그 후

[말글살이] 평어 쓰기, 그 후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상대의 이름을 부르고, 반말만 쓰기. 학생들이 ‘진해, 안녕!’이라 한 지 석달이 지났다. 어찌 됐을지 궁금할 듯. 말끝 하나 바꾸었을 뿐인데, 학생들은 ‘내 언어체계에 분열이 왔다.’고 고백한다. 분열이라니, 야호! 한가닥이던 말의 체계는 꽈배기처럼 순식간에 두가닥으로 갈라지고 뒤엉켰다. 부모 아닌 연장자에게 반말해본 적 없던 학생은 ‘이메일을 반말로 보내는 게 맞는지 수십번 고민’했다. ‘‘안녕하세요’에서 ‘안녕’으로 바뀌었으니 손까지 흔들어도 되는지, 꾸벅 허리를 숙여야 하는지, 아니면 허리를 숙이면서 동시에 손을 흔들어야 할지 헷갈렸다.’ 반갑구나, 번민하는 인간이여. 학생들에게 존댓말은 ‘안전장치’였다. 학생들끼리도..

연재칼럼 2023.04.30

[말글살이] 위협하는 기록

[말글살이] 위협하는 기록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총을 내려놓는다고 저절로 평화가 오지 않는다. 회초리를 내려놓는다고 인권이 넘치고 행복한 학교가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수업 방해, 비아냥과 모욕, 동영상 촬영과 유포가 난무했다. 학생은 선생을 욕하고 놀릴 수 있지만, 선생이 그러면 아동학대다. 학생이 무슨 짓을 해도 당장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교사들은 무기력증에 빠져 있다고 하소연한다(얼마 전 국회 교육위원회에서는 교장에게만 주던 생활지도권을 교사에게도 부여하는 법안을 의결했다). 11월30일 교육부 주최로 ‘학교 교육활동 보호 강화 방안 마련을 위한 공청회’가 열렸다. 교육부 시안에는 중대한 교권 침해를 범한 학생은 학교생활기록부(생기부)에 기록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연재칼럼 2023.04.30

[말글살이] 구경꾼의 말

[말글살이] 구경꾼의 말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녹사평역 3번 출구. 스산한 바람이 뒹굴고 무심한 차들이 질주하는 고갯마루에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분향소가 있다. 바로 곁에 “정치 선동꾼 물러나라”라는 펼침막을 붙인 봉고차 한대. 이 어색한 밀착의 공간을 서성거린다.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 주변을 배회하는 구경꾼들이 있다. 사건을 관망하면서 말을 끄집어내는 구경꾼들의 입은 당사자만큼이나 중요하다. 권력자들을 떨게 만드는 건 구경꾼들의 예측할 수 없는 의지와 결집이니. 8년 전. 세월호 참사 가족대책위 대변인이었던 유경근씨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참사의 원인 규명과 책임자들의 사과, 그리고 재발 방지 약속이다. 이것을 정말 듣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도 희생자 가족..

연재칼럼 2023.04.30

[말글살이] 헛스윙, 헛웃음, 헛기침의 쓸모

[말글살이] 헛스윙, 헛웃음, 헛기침의 쓸모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헛걸음’ ‘헛소리’ 따위에 붙는 접두사 ‘헛-’은 한자 ‘빌 허(虛)’에서 왔다. 사전에선 ‘이유 없다’거나 ‘보람 없다’는 뜻이 덧붙는다고 새기고 있는데, ‘가짜, 잘못, 거짓’의 뉘앙스가 더 강하다. ‘나이를 헛먹다, 헛것을 보다, 헛똑똑이’ 같은 말이 그렇다. 매사를 투입 대비 산출로 생각하는 것이 이 시대의 행동강령이다. 적게 투입하고도 목표를 달성하면 박수를 받는다. ‘헛-’이 붙은 말들은 비능률, 비생산적인 상황을 지목한다. ‘헛-’이 빠지면 실속 있고 원하던 게 이뤄진 것이겠지. 힘을 썼으면 그에 맞는 성과를 얻어야 하리. ‘헛심(힘)’ 쓸 바엔 차라리 가만히 있으라. 눈에 보이는 성과(아웃풋)가 ..

연재칼럼 2023.04.30

[말글살이] 맞춤법·표준어 제정, 국가 독점?…오늘도 ‘손사래’

[말글살이] 맞춤법·표준어 제정, 국가 독점?…오늘도 ‘손사래’ 김진해ㅣ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오늘도 뭉그적거리다 마을버스를 놓쳤다. 처마 밑 길냥이를 찾지 말았어야 했다. 언덕 위로 내달리는 버스를 쫓아가며 “여기요!” “버스!”를 외쳤지만, 무정한 버스는 못 들은 척했다. 2년 전 ‘국가 사전 폐기론’이란 자못 다부진 제목의 칼럼을 썼다. 올봄엔 전면 개정 소식을 듣고 ‘국가 사전을 다시?’라는 제목으로 무려 세 편의 칼럼을 썼더랬다. 줄곧 국가는 사전 편찬에서 손을 떼라는 얘기였다. 토론회를 제안했다. 국립국어원, 사전 편찬가, 글로 밥벌이하는 사람들, 시민들이 모여 말을 나누고 싶었다. 드디어 12월15일(목) 오후 2시 한겨레신문사 청암홀에서 ‘국가 사전과 언어민주주의’라는 제목으..

연재칼럼 2023.04.30

[말글살이] 1.25배속 듣기에 사라진 것들

[말글살이] 1.25배속 듣기에 사라진 것들 게티이미지뱅크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나는 말이 하염없이 느리다. 사이버대학에 올린 내 강의 동영상을 보다가 곧장 게시판에 항복 문서를 올렸다. ‘가만히 듣다 보면 어느새 졸음이 밀려옵디다. 재생 속도를 1.25배로 하니, 졸음이 조금 늦게 오시더군요.’ ‘보통’ 속도로 보는 건 손해다. 1.25배속으로 봐도 ‘줄거리 파악’에 아무 어려움이 없다. 출연자의 목소리가 가늘어지고 신경질적으로 들리긴 하지만, 바쁜 시간을 알뜰하게 아껴 쓴다는 실용주의자의 자부심을 심어준다. 여기에 맛을 들이면서 영상예술에 대한 감각이 변질되더군. 내용과 형식이 분리될 수 있으며, 형식보다는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착각 말이다. 속도를 높일수록 우리 귀는 내용..

연재칼럼 2023.04.11

[말글살이] 내연녀와 동거인

[말글살이] 내연녀와 동거인 최태원 에스케이 회장(왼쪽)과 노소영 아트센터나비 관장. 연합뉴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가끔 연락하는 기자가 있다. 말을 주제로 기자끼리 토론이 붙나 보더라. 말에 대한 감각이 천차만별이니 토론이 자못 뜨거워 보였다. ‘기자들이 말에 대한 고민이 많군’ 하며 즐거워한다. ‘내기’ 를 거는지는 모르지만, 급기야 생각 없이 사는 나한테까지 질문을 한다. 내 대답은 늘 ‘어정쩡’ 하다. ‘이렇게 볼 수도, 저렇게 볼 수도 있지 않겠소이까?’ 며칠 전엔 아트센터나비 관장 노소영씨가 티앤씨(T&C)재단 이사장 김희영씨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김씨를 에스케이(SK) 회장 최태원씨의 ‘내연녀’ 라 할지 ‘혼외 동거인’ 이라 할지로 논쟁이란다. 상식적(?) 으..

연재칼럼 2023.04.11

[김용석의 언어탐방] 슬로푸드: “좋은, 깨끗한, 공정한” 음식

[김용석의 언어탐방] 슬로푸드: “좋은, 깨끗한, 공정한” 음식 다른 한편 맥도날드의 로마 진출은 이탈리아에서 슬로푸드 운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됐다. 슬로푸드는 패스트푸드가 없었으면 나오지 않았을 말이다. 이탈리아 사람에 의해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운동이지만 영어로 이름 지어진 이유다. 패스트푸드가 국제어가 된 이상 슬로푸드도 국제어가 됐다.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김용석 | 철학자 1986년 봄,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에 ‘큰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의 다국적 패스트푸드 기업 맥도날드가 로마 도심 ‘스파냐 광장’에 매장을 열었다. 사건이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일이었다. 우리에게 영어식 발음인 ‘스페인 광장’으로 알려진 이곳은 로마 시민들이 사랑하는 도심 산책로 가운데 하나이자 로마를 찾는 관광객들이 ..

연재칼럼 2023.04.05

[말글살이] 멋지다 연진아, 멋지다 루카셴코

[말글살이] 멋지다 연진아, 멋지다 루카셴코 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파이팅, 박연진. 브라보. 멋지다, 연진아.” 끔찍한 학교폭력의 피해자 동은(송혜교)은 ‘자랑스러운 동문상’을 받는 가해자에게 손뼉 치며 찬사를 보낸다. 그게 칭찬일 리 없지. 복수를 알리는 선언이다. 말을 포함해 모든 기호는 그 자체로는 아무 뜻도 갖지 못한다. 그걸 보고 듣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뭔가가 격발될 때 비로소 기호로서 의미를 갖는다. 상황과 맥락에 따라 열광과 환호,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도 조롱과 비꼼으로 읽힌다. 러시아 옆에 벨라루스라는 나라가 있다. ‘유럽의 마지막 독재자’로 불리는 대통령 루카셴코는 소련 해체 뒤 1994년부터 집권해 지금까지 무려 30년을 철권통..

연재칼럼 2023.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