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말글살이] 화무십일홍

닭털주 2023. 7. 30. 12:54

[말글살이] 화무십일홍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삼류 무림의 세계로구나!’

 

자신이 한때 몸담았던 공간을 이렇게 풍류(?)를 담아 선언하고 나면, 격동하던 마음도 가라앉고 이 풍진 세상을 견딜 힘이 생긴다. 권모술수와 이합집산이 어디 천하를 경영하는 자들의 세계에서만이랴.

작고 구체적인 삶일수록 더욱 치졸하고 비루한 법.

세상은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나는 왜 이러고 있는가?’ 같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금언은 미리 알려진 모범답안이다.

게으른 방식이지만, 상황을 이겨내는 데 유용할 수 있다.

군에 갓 입대한 젊은이에게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은 두려움을 이겨낼 힘을 준다.

곤궁한 사람에게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은 위로와 용기를 선물한다.

 

하지만 금언은 진실의 유령. 진실을 담고 있으나 직접 목격하기가 힘들다.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는 현실을 그럴듯한 희망의 말로 바꿈으로써

그 불가항력마저도 내 손아귀에 있다는 착각을 심어준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열흘 동안 붉은 꽃은 없다. 그렇지, 활짝 핀 꽃도 열흘을 버티긴 힘들지.

변치 않는 진실이긴 한데,

재차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은 핀 꽃이 도무지 시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피지 못한 꽃망울들은 도무지 필 기회조차 없는 현실 때문이겠지.

권불십년(權不十年).

십년을 넘기는 권력이 없다는데,

얼굴만 바꾸어 연년세세 권력이 이어지고 있다는 이 느낌은 뭐지?

권력을 상대화할 능력이 없는 자들에게 이 세상이 저당 잡혀 있어서인가.

권불십년이라 호기롭게 되뇌지만,

현실 권력을 당분간묵인하는 쓸쓸한 알리바이인지도 모른다.

(‘십년만 해먹어라. 딱 십년이다!’)

 

확고한 금언일수록 믿을 수 없다.

화무십일홍이 맞는가? 권불십년이 맞는가?

이토록 삼류 무림의 세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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