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말글살이] “김”

닭털주 2023. 3. 11. 21:38

[말글살이] “

 

 

올겨울 들어 가장 낮은 기온을 기록한 1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사거리에서 시민들의 입김이 뿌옇게 보이고 있다. 김명진 기자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우리 딸은 아빠를 잘 이용한다.

밥을 푸러 일어나 두세 걸음을 옮길라치면 등 뒤에서 아빠, 일어난 김에 물 한잔만!’.

안 갖다줄 수가 없다.

매번 당하다 보니 저 아이는 아빠를 잘 써먹는군하며 투덜거리게 된다.

중요한 건 때를 잘 맞추는 것. 늦지도 빠르지도 않아야 한다.

잠자코 기다리고 있다가 누군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면 먹이를 낚아채는 야수처럼 세 치 혀를 휘둘러 자기 할 일을 슬쩍 얹는다.

 

밥을 하면 밥솥에서 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물을 끓이면 주전자에서 김이 뿜어져 나온다. 추운 날 내 입에서도 더운 김이 솔솔 나온다. 모양이 일정치 않고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다가 이내 허공에서 사라진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세상 이치를 집안에서 알아챌 수 있는 것으로 이만한 게 없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

장 보는 김에 머리도 깎았다처럼

‘~하는 김에라는 표현을 이루어 두 사건을 이어주기도 한다.

단순히 앞뒤 사건을 시간순으로 연결하는 게 아니다.

앞일을 발판 삼아 뒷일을 한다는 뜻이다.

장을 보고 머리를 깎았다와는 말맛이 다르다.

앞의 계기가 없다면 뒷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가능성이나 아쉬움으로 남겨두었겠지.

기왕 벌어진 일에 기대어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용기를 낸다.

말 나온 김에 털고 가자.’

생각난 김에 전화해 봐.’

변화를 위해선 뭐든 하고 있어야 하려나.

 

‘~하는 김에가 숨겨둔 일을 자극한다는 게 흥미롭다.

잠깐 피어올랐다 이내 사라지는 수증기를 보고 뭔가를 더 얹는 상황을 상상하다니.

순발력 넘치는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