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기역 대신 ‘기윽’은 어떨까, 가르치기도 편한데 [말글살이]

닭털주 2023. 10. 6. 09:40

기역 대신 기윽은 어떨까, 가르치기도 편한데 [말글살이]

 

 

게티이미지뱅크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마르고 닳도록 입고 다니던 청바지가 버스에 앉는데 찍 하고 찢어졌다.

천을 덧대어 오버로크해서 버텼으나, 오래 못 가 뒷무릎까지 찢어졌다.

아깝더라도 버릴 수밖에.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김수영)지만, 언젠가는 버려야 할 때가 온다.

한글 자음 이름도 그렇다.

한글 창제 후 백년쯤 지나 최세진은 어린이용 한자학습서 훈몽자회를 쓴다.

이란 한자에 하늘 천이라고 적어두면 자습하기 편하겠다 싶었다.

명민한 최세진은 이름만 배워도 그것이 첫소리와 끝소리에서 어떻게 발음이 되는지 알 수 있게 만들었다.

리을, 비읍처럼 이으의 앞뒤에 ㄹ, ㅂ을 붙이면 첫소리와 끝소리를 연습할 수 있겠다.

그래서 이름을 梨乙(리을), ‘이름을 非邑(비읍)이라고 지었다.

기발하고 참신하다.

그런데 처음부터 문제였다.

도 기윽이라 해야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이라는 한자가 없다.

하는 수 없이 발음이 비슷한 ()을 써서 其役(기역)이라 했다.

이런 식으로 이름 붙인 게 ㄱ, , 3개다.

도 디읃으로 하고 싶지만, ‘이란 한자가 있을 리 없지.

()이란 한자에 동그라미를 치고 이건 뜻으로 읽으라고 해 놓았다.

옛 발음으로 귿 말이니, ‘디귿되겠다.

時衣(시의)라 쓰고, ()에 동그라미를 쳤다. 옷 의이니 시옷.

궁여지책이었다.

기역, 디귿, 시옷인지 설명해 주는 선생도 드물었다.

외국인에게 가르칠 때도 이름은 슬쩍 넘어간다(그거 알려주다간 날 샌다).

남북이 함께 만드는 겨레말큰사전에는 기윽, 디읃, 시읏으로 통일했다.

어린이나 외국인에게 가르치기도 편하다.

바꿀 땐 바꿔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