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그냥 부자’의 두 의미, 그냥 지나칠 수 없지 [말글살이]

닭털주 2024. 3. 11. 09:11

그냥 부자의 두 의미, 그냥 지나칠 수 없지 [말글살이]

수정 2024-03-07 18:45 등록 2024-03-07 14:30

 

 

영화 파묘’. 쇼박스 제공

 

 

영화 파묘에 나온 그냥 부자란 말이 입길에 자주 오르내린다.

그냥은 철학적 무게가 느껴지는 부사이다. 그러니 그냥 지나칠 수 없지.

 

뭉뚱그려 말해 그냥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그대로라는 뜻이다.

요즘 어떻게 지내?” “그냥 있지 뭐.”

이거 저쪽으로 옮길까?” “아니, 그냥 그 자리에 둬.”

변함없이 그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아무 이유나 조건 없이라는 뜻이 있다.

어쩐 일로 연락을 했어?” “그냥.”

왜 날 좋아해?” “그냥 좋아.”

그 일을 왜 하는가?” “그냥 한다오.”

복잡한 계산 없이 마음 가는 대로.

사랑과 우정과 환대의 세계는 반대급부나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는 그냥의 공간이다.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의 공간.

 

하지만 이 말이 그냥 부자처럼 사회경제학적 맥락에서 쓰이면 달라진다.

태생이, 유전자가, 운명이 부자로 살도록 정해진 사람들. 그들에게 이유가 없는 게 아니다.

이유를 숨기는 것일 뿐. ‘그냥 부자는 우리를 감싸고 있는 인과의 그물망을 외면한다.

 

그냥 부자란 표현은 두 의미가 겹쳐 있다.

날 때부터 쭉 변함없이 그대로 부자란 뜻도 있고,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 이유를 모른다는 뜻도 되겠다.

하지만 물질적 부뿐만 아니라, 이 세계의 모든 현상과 존재는 그냥 원래부터,

본유적이고 독립적으로 생겨난 건 하나도 없다.

무수한 상호작용의 그물망이 이 세계를 만들었다.

무수한 원인과 조건이 쌓이고 맺어져 결과를 낳는다. 원인 없는 결과는 마치 한쪽 끝만 있는 막대기처럼 불가능하다.

그것을 망각하거나 외면하려는 건 우둔하거나 놓치고 싶지 않은 게 많아서이다.

 

그냥 부자는 없다. ‘그냥 가난뱅이가 없듯이.

 

김진해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