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소끔 [말글살이]
수정 2025-03-07 07:26 등록 2025-03-06 14:30
우리 엄마는 요리를 잘 못했다. 가난뱅이 손에 쥐어진 식재료가 마르고 앙상한 것밖에 없어서였겠지만, 그걸 입에 맞게 탈바꿈시키는 재주가 엄마에게는 없었다. 싼 물엿으로 조린 멸치볶음은 늘 딱딱하게 한 덩어리로 굳어 있어서 씹을 때마다 입천장을 찔렀다. 김치는 짜고 질겼고, ‘짠지’는 짰지만 물컹했다. 철 지난 자반고등어는 가시만 많고 살은 적어 성마른 젓가락질을 하다 보면 목에 가시가 자주 걸렸다. 소풍날 김밥은 진밥 때문인지 싸구려 김 때문인지 늘 터져 있었다.
특히 엄마가 잘 못 만드는 음식은 시금치나물이었다.
봄철 별미인 시금치나물은 시금치를 적당히 데치는 게 관건이다.
한소끔 끓어오를 때 불을 끄고 바로 건져내야 사각사각 씹히는 맛을 살릴 수 있다.
엄마는 시금치를 데치면서 한눈을 팔다가 때를 놓쳤다.
흐물흐물해진 시금치나물은 묵은지 같았다.
‘한소끔’에 대한 감각의 빈곤이랄까. 한번 끓어오르는 걸 알아채려면 물의 형편을 내내 살펴야 한다.
세차게 끓어올라도 단 한번만이다.
이내 불은 꺼지고 나물은 건져져 찬물에 몸을 내맡겨야 한다.
‘소끔’이 어디에서 온지 모르니 사전에도 ‘한소끔’만 올라 있다.
‘한’은 몇가지 뜻을 갖는데, 흔하게는 ‘한살, 한권’에서처럼 ‘하나’라는 뜻으로 쓰인다. ‘한길, 한글’에서처럼 ‘크다’거나 ‘한 학교, 한 반, 한마음’처럼 ‘같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한입, 한아름, 한 사발’에 쓰인 ‘한’은 ‘가득하다, 충만하다’는 뜻을 갖는다.
한소끔은 그저 ‘한번 끓기’라기보다는 ‘만족스럽게 끓기’에 가깝다.
간절히 끓지만 한번으로 족하다,
당신처럼. 촐랑대며 여러번 끓으면 ‘부글부글’이나 ‘펄펄’이 된다, 나처럼.
김진해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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