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깊이 [말글살이]
수정 2025-04-24 18:43 등록 2025-04-24 14:30
질문과 사람에 따라 답하는 말의 깊이가 달라진다. 게티이미지뱅크
고민이 하나 있다. 옷에 튄 한 방울 김칫국물 자국처럼 내내 신경이 쓰인다.
자질구레하여 말 꺼내기도 남사스러운 고민인즉슨, 누군가 ‘오늘 시간 어떠냐’는 물음에 답하는 말본새를 보고 있노라면 가관이라 그렇다.
시간이 안 나면 ‘약속 있다’ ‘일 있다’ 정도로 답하면 좋으련만 안 되는 이유를 다 말한다.
“같이 하숙하던 친구를 칠십년 만에 만나기로 했어요”라는 식이다.
혹여 시간이 나면 ‘2시 이후에 괜찮다’고 짧게 답해도 되는데, 굳이 “오전에 수업 마치고 학생들한테 짜장면 얻어먹기로 했으니, 2시 이후에나 봅시다”라 한다.
‘뭐 하러 개인 일정을 시시콜콜 얘기하냐’는 핀잔을 듣고 나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드디어 누군가 ‘내일 시간 되냐’고 묻길래, 옳다구나 ‘선약이 있소이다!’라는 장쾌한 대답을 날렸더랬다. 멋(?)있어 보이긴 하던데, 한편으론 왠지 젠체하는 거 같고 고압적이라는 느낌이 들어 이내 그만두었다.
늘 그런 건 아니다.
충남 논산 어느 냉면집 주인이 ‘어디서 왔냐?’고 묻자 ‘서울이요’라고 말하고 나서 스스로 기특하더라. ‘강북구 삼각산로 4가길’이라 하지 않고, ‘위도 37.6396도와 경도 127.0257도가 만나는 지점’이라고도 하지 않고, 게다가 ‘한국’이라거나 ‘태양계의 세번째 행성’이라고도 하지 않았으니, 얼마나 맞춤한가.
질문과 사람에 따라 내뱉는 말의 깊이가 달라진다는 것인데, 유독 ‘시간 있냐’는 말에 저렇게 넘치도록 말하는 심리는 뭐냐는 거다.
과잉 친절인가. 친근해 보이려는 수작인가.
거리 조절 실패에 따른 말의 누수 현상인가.
반대로 타인에게 주눅 들어 이실직고하는 버릇이 든 건가. 이 모든 것의 합성물인가.
당신은 “오늘 시간 어때?”라는 물음에 뭐라고 답하던가?
김진해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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