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 칸트의 도덕법칙이 말하는 것

닭털주 2022. 4. 3. 08:44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칸트의 도덕법칙이 말하는 것

 

[고명섭의 카이로스]

지난 대선 기간 중에 최저 임금 제도노동 시간 규제같은 사회적 방어 장치를 뜯어내겠다는 공언이 유력 후보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국가를 이끌어가는 자의 임무를 생각하지 않는 발언이다. 구성원 다수의 취약한 인간성을 보호하는 장치를 철폐하는 데 국가 권력을 쓰겠다고 공언하는 것은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지 않고 오로지 수단으로 쓰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1724~1804). 위키미디어 코먼스

 

 

니시다 기타로(1870~1945)는 일본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불릴 만한 사람이다. 일본 전통 불교 사상을 바탕에 두고 서양 철학의 언어와 개념을 자재로 삼아 자기만의 고유한 철학 체계를 세웠다. 니시다 철학의 구축은 그대로 일본 근대 철학의 탄생이자 절정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니시다 이전에 근대 철학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고 니시다 철학과 함께 일본 근대 철학이 봄날 벚나무처럼 꽃망울을 터뜨렸다. 또 니시다 철학을 태반으로 삼아 교토학파라고 부르는 철학자들이 탄생했다. 니시다가 1910년 교토제국대학 철학과 교수가 된 뒤에 그 품 안에서 성장한 철학자들이기에 그렇게 부른다. 교토학파는 비슷한 시기에 막스 호르크하이머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에 세운 사회연구소를 거점으로 하여 형성된 프랑크푸르트학파에 견줄 만하다.

 

니시다 철학이 명확한 윤곽을 드러낸 것은 1911년에 나온 <()의 연구>라는 철학서다. 이 책에서 니시다의 독창적인 존재론과 윤리학이 처음 형태를 갖추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 철학이 본격적으로 수입돼 유통된 지 40여년 만의 일이다. <선의 연구> 3편에는 이마누엘 칸트의 실천적·윤리적 정언명령에 대한 니시다의 해석이 등장한다.

니시다는 칸트의 정언명령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누구나 알듯이 칸트의 가르침은 나 자신과 타인의 인격을 존중하고 목적 그 자체로 대하라는 것, 결코 수단으로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니시다는 이 책에서 플라톤부터 괴테까지 서양 철학의 주요 개념과 언어를 자유자재로 인용하고 있지만, 이 칸트 인용문만큼은 정확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칸트가 <실천이성비판>에서 비슷한 말을 한 것은 사실이다. “전체 피조물 가운데 인간이 다룰 수 있는 모든 것은 또한 한낱 수단으로 쓰일 수 있다. 오직 인간만이 목적 그 자체다. 인간은 자유의 자율에 힘입어 신성한 도덕법칙의 주체다.” <실천이성비판>의 또 다른 구절에서 칸트는 이렇게 말한다. “목적들의 질서에서 인간은 목적 그 자체다. 다시 말해 인간은 결코 순전히 수단으로만 사용될 수는 없다.”

칸트의 이 말들은 언뜻 들으면 니시다의 발언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실천이성비판>보다 앞서 저술한 <도덕 형이상학의 정초>를 보면 칸트의 생각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칸트는 한결 명료한 정식으로 도덕법칙을 이야기한다. 칸트의 말은 다음과 같다. 너는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나 인간성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서 대하고 한낱 수단으로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하라.”

니시다의 발언은 나 자신과 타인의 인격을 목적 자체로 대하고 결코 수단으로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지만, 칸트의 법칙은 나 자신과 타인의 인격을 수단으로만 쓰지 말고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는 것이다. 니시다는 칸트의 입을 빌려 인격을 결코 수단으로 쓰면 안 된다고 강조하지만, 정작 칸트의 발언에는 인격을 수단으로 쓰지 말라는 구절이 없다. 칸트의 주장은 타인의 인격을 수단으로만 쓸 것이 아니라 동시에 항상 목적 그 자체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차이에 주목해 후대의 일본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은 <윤리21>이라는 저작에서 니시다의 칸트 해석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바 있다. 가라타니는 다이쇼 시대(1912~1926)의 학생들 사이에서 칸트의 도덕법칙이 니시다 방식으로 이해돼 유행했다고 지적한다. 당시 학생들이 칸트의 도덕법칙을 타인을 결코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오직 목적으로 대하라는 명령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가라타니는 그렇게 타인을 오직 목적으로 대하는 것은 그 시절 학생들이 지내던 학교 기숙사 같은 제한된 영역에서나 겨우 가능했을지 모른다고 말한다. 하지만 기숙사 생활도 학비를 보내는 부모를 수단으로 삼은 것이었고 부모는 자식의 학비를 대려고 타인을 수단으로 삼아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됐다. 그런 문제를 당시 학생들은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이쇼 시대가 끝나고 마르크스주의가 새 유행이 되자 칸트의 도덕법칙은 현실성 없는 것으로 경멸받는 처지에 몰렸다고 가라타니는 말한다. 이런 사정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어로 공부하던 조선의 학생·지식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것이다.

가라타니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이다.

칸트의 윤리적 명령은 인간, 곧 노동자를 수단으로 삼는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바꿀 때에만 온전히 실현될 수 있다.’

그래서 19세기 말 서구에서는 칸트의 윤리학에 입각해 자본주의 극복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등장하기도 했다. 독일 마르부르크대학의 신칸트학파를 이끈 헤르만 코엔은 칸트의 정언명령을 사회주의적 도덕 강령으로 해석했다. 코엔은 이렇게 말했다.

목적으로서 인류의 탁월성이라는 이념은 단지 이 이념만으로도 사회주의적 이념이 되며, 그 결과로 인간 각자는 최종적 목표이자 목적으로 규정된다.”

그런데 이런 칸트식 사회주의 혹은 칸트주의적 마르크스주의는 레닌주의적 마르크스주의가 러시아 혁명을 거쳐 대세를 장악한 뒤로 마르크스주의 역사에서 패퇴하고 말았다.

거듭 주목할 것은

칸트가 인간을 결코 수단으로 써서는 안 된다고 말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칸트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수단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을 한순간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타인을 동시에 목적으로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본주의 체제는 작동 원리대로 놔두면, 타인의 인격이 오로지 수단이 되는 경향을 피할 수 없다. 타인을 노동력으로 환원한 뒤 그 노동력을 수단으로 삼아 상품을 만들고 그 상품을 유통시켜 이윤을 증대하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품 관계 속에서 노동자들은 한낱 노동력을 담지한 생산 수단이 되고 만다.

자본주의 체제의 컨베이어벨트 앞에서 노동자들이 그렇게 한낱 생산 수단이 되는 것을 두고 죄르지 루카치는 <역사와 계급의식>(1923)에서 사물화라고 불렀다. 인간이 인격성을 잃고 사물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떨어지고 만다는 얘기다. 가라타니 고진은 인간을 사물화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지 않는 한, 칸트의 윤리적 명령이 온전히 실현될 길은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칸트가 구상한 목적의 나라로 가려면 자본주의 극복은 우회할 수 없는 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칸트의 본디 생각에 입각해서 보면, 자본주의를 극복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수단으로 쓰이는 일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유한한 존재로서 인간은 분업 체제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삼아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인간을 수단으로 쓰더라도

동시에 항상목적으로 대한다는 원칙이 관철되는 것이다.

목적의 나라는 인간의 수단화가 아예 없는 나라가 아니라 인간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는 나라,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이 서로를 존엄한 자율적 인격체로 대하는 나라다.

그런 원칙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도 어느 정도는 구현할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인간을 상품화하고 사물화하는 본질적 경향이 있다.

그런 경향은 자연법칙처럼 작동하는 것이어서 그대로 두면 인간성이 말살되는 지경에까지 이를 수 있다.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 그런 비인간적인 노동 착취가 아무런 제약 없이 벌어졌다. 19세기 이래 반자본주의 혁명 운동은 바로 그런 극단적 수단화 경향에 맞서서 인간성을 지키고 높이려는 인류의 집합적 투쟁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투쟁 덕분에 자본주의 체제는 붕괴하지 않고 살아남아 번영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최저 임금 제도노동 시간 규제같은 것이 바로 인간을 수단화하고 사물화하는 자본의 파도에 맞서 기나긴 투쟁을 통해 쌓은 사회적 방파제 가운데 일부다.

지난 대선 기간 중에

이런 사회적 방어 장치를 뜯어내겠다는 공언이 유력 후보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국가를 이끌어가는 자의 임무를 생각하지 않는 시대역행적인 발언이다.

자본의 탐욕에 재갈을 물리고 자본의 파괴적 힘을 다스리는 것이 국가가 해야 할 일 아닌가. 국가는 그런 일을 할 때 비로소 국가다워진다.

구성원 다수의 취약한 인간성을 보호하는 장치를 철폐하는 데 국가 권력을 쓰겠다고 공언하는 것은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지 않고 오로지 수단으로 쓰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만 쓰면서 그 자신이 목적이 될 수는 없다.

타자의 인간성을 파괴할 때

그 자신의 인간성도 파괴되는 것이 인간 존재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고명섭 | 책지성팀 선임기자

<니체 극장-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즐거운 지식-책의 바다를 항해하는 187편의 지식 오디세이>, <광기와 천재-루소에서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지식의 발견-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을 썼다. 카이로스는 때, 시기, 기회를 뜻하며 현재를 밝히는 순간의 섬광을 가리킨다. 카이로스의 눈으로 철학·사상·역사를 포함한 인문학을 탐사하며 우리 시대와 대화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