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모든 것이 변해가네

닭털주 2022. 4. 4. 08:21

모든 것이 변해가네

 

 

<싱어게인2>(JTBC)에서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 봐를 부르고 있는 가수 김소연. 제이티비시 유튜브 갈무리

 

[크리틱] 정영목 | 번역가·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텔레비전에서 가요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다, ‘아니, 저 나이에 어떻게 저게?’라고 속으로 탄성을 지르게 되었다. 물론 이런 경우에 탄성이란 대개 나이 든 사람이 젊은 세대의 유행을 잘 소화할 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젊은 사람이 예전 세대의 느낌을 멋지게, 어떤 면에서는 원래보다 잘 번역할 때 나오는 것이다.

나이 드는 서글픔 가운데 하나가

이런 세대 건너뜀이 대체로 일방통행이라 반대 방향으로 통과하려 너무 애쓰다 보면

주책이 되기 쉽다는 거니까.

어쨌든 그 탄성은 나만이 아니라 노래를 들은 많은 사람이 함께 내뱉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흐르다 보니 의문이 고개를 든다.

과연 예전 세대의 느낌이 따로 있고 지금, 또는 젊은 세대의 느낌이 따로 있는 것일까.

이 또한 감수성이 퇴화하고 정서가 말라버려 그나마 남은 걸 내 걸로 지켜보고자 하는 나 같은 사람이 만들어내는 고정관념이 아닐까. 멀리 갈 것도 없이 나 자신만 보아도 이대남 시절의 내가 지금 내 느낌의 많은 부분에 그렇게 무지했던 것 같지는 않다(무시했을지는 몰라도). 무엇보다 수많은 변화의 가능성 앞에 선 설렘 또는 좌절과 변치 않는 정체성을 구축하려는 의지가 일으키는 긴장만으로도 다른 시기에는 다가가기 힘든 수준의 파토스가 나타났다.

마침 그 프로그램에서 이십대에 갓 진입한 김소연도 마지막에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 봐를 불렀다. 이 가수가 태어나기 오래 전인 1988년에 봄여름가을겨울이 발표한 원곡에서는 불사신 같았던 전태관의 드럼이 지배하는 가운데 노래를 만든 김종진이 냉소적으로 세월 흘러가면 변해가는 건 어리기 때문이야라고 읊조린다. 반면 김소연은 이리로 가는 걸까 저리로 가는 걸까/ 어디로 향해 가는 건지 난 알 수 없지만에 방점을 찍어 설핏 설렘도 느껴진다. 같은 해에 동물원의 음반으로 나왔지만 김광석이 다시 불러(1995) 잘 알려진 변해가네’(김창기)그 누가 뭐라 해도 돌아보지 않으며/ 내가 가고픈 그곳으로만 가려 했던 이대남이 속수무책으로 너무 쉽게” “너무 빨리변해가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 느끼는 좌절감과 저항감에 무게가 실리지만, 사실 두 노래는 동전의 양면이다.

아마도 김광석이 이 노래를 부를 때 이십대를 향하고 있었을 정밀아는 세월이 좀 흐른 뒤 어머니와 통화할 때 담담하게 그걸 종합한다.

서울역에서 출발한 내 스무살은 한 백번은 변한 것 같아/ 그게 뭐 어떻다는 것은 아니고 그냥 그랬구나 하는 거예요”(‘서울역에서 출발’, 2020).

이렇게 백번은 변한젊음을, 또 그 낱낱의 개별성을 어떤 한두가지 특성으로 고정하려면 만용이 아니면 어떤 저의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실제로 좁은 범위지만 내가 접하는 젊은이들에게 공통된 특징이 한가지 있다면 그런 식으로 규정당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점인 듯하다.

누가 이들의 변화, 또는 좌절된 변화의 합을 쉽게 예측할 수 있을까. 여러 면에서 놀라운 영화 <레벤느망>(오드리 디완)에서 내가 특히 놀란 것 하나는 이게 1963년의 프랑스 대학가가 배경이라는 점이다.

어둠에 묻으려는 여성의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더 그렇게 보이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답답한 곳에서 불과 5년 뒤에 세상을 뒤집는 변화가 일어난다는 게 잘 믿어지지 않는다. 아니 거꾸로, 이곳에서 변화와 가능성을 봉쇄한 것이 68혁명의 폭발성을 설명해준다고 봐야 하나.

그러고 보면 영화 곳곳에 심어진 변화의 씨앗들이 눈에 띄기도 하는데, 다름 아닌 주인공(아나마리아 바르톨로메이) 자신이 변화의 도드라지는 주역 아닌가. 그래서일까, 모진 변화를 겪고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이 다부진 이대녀에게서 격변의 전조를 드러내는 여신의 얼굴이 어른거리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