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독재자의 아들은 어떻게 돌아왔나

닭털주 2022. 5. 13. 10:32

독재자의 아들은 어떻게 돌아왔나

 

조기원 | 국제뉴스팀장

 

 

1986222일부터 25일까지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200만명 넘는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21년간 장기집권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피플 파워’(민중의 힘)라고 불리는 시민혁명 결과, 마르코스와 가족들은 하와이로 망명했고 그 가문은 정치적으로 몰락한 것처럼 보였다.

그로부터 36년 뒤인 지난 9일 치러진 필리핀 대통령 선거에서

마르코스의 아들 마르코스 주니어(65)가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비공식 집계로 전체 유권자 6700여만명 중 3100만여명의 지지를 받아 경쟁자인 레니 로브레도 부통령을 두배 이상 차이로 이겼다.

 

마르코스 주니어는 아버지 마르코스가 계엄령을 통해 필리핀을 통치했던 시기인 198023어린 나이로 가문의 정치적 기반인 북부 일로코스노르테주의 부주지사가 되어 직접 정치에도 참여했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36년 만에 정권 재창출에 성공한 첫번째 이유는

그와 그의 지지자들이 마르코스 정권 시절을 독재정권 아래 인권탄압이 벌어지고 마르코스 가문이 부정축재를 했던 시기가 아니라 필리핀의 황금기로 홍보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마르코스 정권 시절을 아름다운 시절로 묘사하는 글 등이 최근 몇년간 필리핀 소셜미디어에 떠돌았다. 마르코스 정권 시절 필리핀이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부유한 나라였다고 주장하는 글도 많은 이들이 공유했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마르코스 집권 첫해인 1965년 필리핀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아시아 일곱 번째였으며,

경제는 성장세였다. 마르코스는 집권 전반기 국외 차관을 들여와 사회기반시설(SOC) 건설에 투자해 경제성장 속도를 높이려 했다. 이런 투자에 세계 원자재 가격 상승효과까지 겹치면서 1976년 경제성장률이 8.8%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부패로 사회기반시설 투자는 큰 효과를 내지 못했고, 대외부채 급증에 원자재 붐까지 사그라지면서 마르코스 정권 후반기인 1984년과 85년 필리핀 경제는 각각 7.3% 역성장했다.

필리핀 경제는 마르코스 정권 내내 암흑기였던 것은 아니지만 황금기는 더욱 아니었다.

 

마르코스 주니어 쪽은 아버지가 집권하던 시절의 사회기반시설 투자를 강조하는 글과 영상을 소셜미디어 등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했지만, 대선후보 토론회 참가는 피했다.

필리핀 유권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18~41살은

마르코스 독재 정권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어

소셜미디어를 주 무대로 한 마르코스 가문에 대한 포장은 더욱 효과를 발휘했다.

하지만 마르코스 주니어가 압도적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소셜미디어를 능수능란하게 활용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피플 파워를 기억하는 장년층 상당수도 마르코스에게 표를 던지지 않았다면, 그가 대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는 거둘 수 없었다.

피플 파워 이후에도 필리핀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가문 정치와 극심한 빈부격차는

근본적으로 해소되지 않았다.

세계은행 통계(2018년 기준)를 보면,

필리핀의 계층 간 소득의 불균형 정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0에 가까울수록 평등하고 1에 근접할수록 불평등)0.42로 주변 동남아시아 국가인 타이(0.36), 인도네시아(0.37)보다 높다.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 이런 여러 현실 문제들을 해결해줄 있을 수 것이라는 기대가 마르코스 주니어 정권 탄생의 배경 중 하나다.

남부 민다나오의 정치 가문 출신으로 마약과의 전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숱한 인권탄압 논란을 일으킨 로드리고 두테르테 현 대통령도 이와 비슷한 배경에서 집권에 성공했다.

사실 이런 문제야 필리핀만의 문제겠는가.

필리핀 대선 소식을 단순한 화제성 뉴스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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