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조작이 출세 수단, ‘사이비 능력주의’ 조장
[이봉수 제주 이왁] MBC저널리즘스쿨 2기 고별강연
이봉수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 원장
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는 바다 건너 버려진 땅이었고 죄수를 보내는 유배지였다.
지금은 이익을 노려 자본이 몰려들지만 진정으로 제주를 이해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나 또한 제주 사람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 있으리라.
그런 제주인의 한과 정서를 이해하려다 제주학에 빠졌고 도민이 됐다.
키아오라리조트를 운영하면서 제주가 미디어와 인문학 교육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는 각오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을 설립했다. ‘이봉수 제주 이왁'은 제주민과 나의 일상에 인문학과 세상 ‘이야기’(제주어로는 ‘이왁’)를 덧실어 보내는 글이다.
김윤식 교수 5주기의 종강사 흉내
가을의 이별은 더 오래 아련한 추억으로 남는다.
패티 김의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도 이용의 ‘잊혀진 계절’도 가을 분위기를 탄 덕분에 더 히트를 쳤을 거다. 학교의 종강과 졸업식이 겨울이나 여름에 있는 것과 달리 MBC저널리즘스쿨은 가을에 끝난다. 종강은 지난달 26일 했지만 그동안 각종 과제는 물론 개인지도를 원하는 학생들이 보내온 글 등을 틈틈이 첨삭해서 되돌려주느라 진짜 종강은 어제서야 했다. 나는 마지막 수업에서 시의성이나 계절에 맞는 시나 가곡 또는 대중가요를 들려주면서 학생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을 덧붙이곤 한다.
시를 한 편 소개하는 수법은,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국문학자 김윤식 교수를 흉내내는 거다. 그는 마지막 수업이 끝날 무렵 워즈워스의 시 ‘초원의 빛’을 칠판에 적어 내려갔다.
한때 그토록 휘황했던 빛이
영영 내 눈에서 사라졌을지라도
들판의 빛남, 꽃의 영화로움의 한때를
송두리째 되돌릴 수 없다 해도
우리는 슬퍼 말지니라.
그 뒤에 남아 있는
힘을 찾을 수 있기에.
윌리엄 워즈워스의 고향 그라스미어(Grasmere)와 호반에 핀 꽃. 사진 오른쪽 위 마을에 그가 살던 집이 있다.
© Lake District National Park
캠퍼스에 온통 사복형사와 전경들이 깔려 건물 안에도 마구 들어오던 시절, 그는 시를 낭송한 뒤 해설도 없이 교실을 나갔지만 여운은 오래 남았다. 그로부터 30년 뒤 영국 유학 시절, 대학 동기생 5명이 케임브리지 우리 집으로 와서 유럽 여행을 함께했다. ‘폭풍의 언덕’ 등을 쓴 브론테 자매의 고향인 하워스의 황량한 들판과 워즈워스의 고향인 잉글랜드 북부 호수 지역도 거닐었는데, 한 여성 동기생이 ‘초원의 빛’을 읊조리며 학창시절의 추억을 되살리는 게 아닌가!
김윤식 교수가 작고한 날도 5년 전 가을이었는데, 오늘(25일)이 바로 기일이다.
‘초원의 빛’을 읊조리던 동기생도 바로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 이 가을 동기생들을 제주 키아오라리조트로 초대했는데 그 동기생은 오지 못한다.
‘학문·예술·언론의 표절과 창작 사이’
나의 종강사는 뒷부분으로 미루고, 고별강연의 내용을 조금 섞어서 표절과 조작의 폐해가 한국 사회에 끼치는 악영향이 얼마나 심각한지 말하고 싶다. 강연 주제는 ‘학문·예술·언론의 표절과 창작 사이’였는데, 학계·예술계·언론계 할 거 없이 만연한 ‘표절·조작공화국’의 실상을 인식하고, 글을 쓸 때 표절과 조작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방법을 터득하는 수업이었다.
우리나라가 표절공화국이 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집단은 학자들이다.
2004년에는 권위있는 학술지 <네이처>에 논문이 아니라 한국인 과학자들이 최소 8편의 논문을 표절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김병준 교육부총리는 표절을 막아야 할 책임자이면서도 논문 표절 사실이 밝혀져 사퇴하고 국민대로 복귀했다.
외국에서는 표절이 문제되면 대학에서도 정계에서도 당연히 추방되는데 우리나라는 대학과 정치판이 ‘도피처’다.
국민대는 IOC 위원이자 국회의원이던 문대성 씨의 박사 논문을 표절로 판정했지만 그는 새누리당을 탈당만 하고 무소속 의원이 됐다.
국민대는 김건희 여사 박사논문 표절 의혹과 관련해 이번 국정감사에도 불출석하는 꼼수를 부렸다.
교수들이 대학원생 논문에 기여한 바도 없이 자기 이름을 올리는 일도 관행처럼 반복된다. 교수들이 그 모양이니 우리나라 대학은 논문 표절과 관련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강의를 제대로 하는 곳이 드물다. 2001년에 런던대 골드스미스칼리지 석·박사과정에 입학했더니 첫 주에는 특별 강연들을 통해 저작권 보호와 표절방지책, 출처를 인용하는 글쓰기를 누누이 강조했다.
표절·위조로 쌓은 부와 권력이 영원할까?
황우석 박사의 논문 조작 사태 이후 2006년에는 과학계 원로들이 부정행위에 제동을 건다며 낸 책 <탐욕의 과학자들>이 <뉴욕타임스> 과학기자들이 쓴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을 84쪽이나 베꼈다고 <프레시안>이 보도했다.
‘표절하지 말자’며 표절을 한 것이다.
문화예술계도 유명한 소설가들이 표절 시비에 휘말렸고 조용필의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돌아와요 충무항에’의 저작권을 침해했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사진작가 그레고리 콜버트의 작품(왼쪽)과 내가 강연용으로 소장하고 있는 두 책.
출판사는 번역서 의 책 표지(가운데) 등에 그의 사진을 그대로 사용했다가 고소되자 삽화를 살짝 바꿔 다시 발행했다(오른쪽).
© 이봉수 강연 PPT 자료
마감 시간에 쫓기는 언론계에서는 타사 사설을 베껴 쓰는 사건이 여러 번 발생했고,
사실관계를 조작해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짓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타사 단독보도를 출처를 밝히지 않고 베껴 쓰는 일은 일상이 됐다. 특히 법조기자단은 검찰이 한 기자에게 피의사실을 흘리면 일제히 보도해 피의사실 공표죄마저 거의 사문화했다.
표절과 조작은 학문과 예술의 발전을 저해할 뿐 아니라 언론의 신뢰를 떨어뜨려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가는 길을 차단한다. 은행잔고 서류 등을 위조해 부를 쌓고 논문 표절로 학력을 위조한 사람이 명예와 권력을 누리는 세태를 보며 ‘보통 사람들’은 절망한다.
처벌도 안 하는 사례가 많아 위험 부담이 적으니
표절과 조작은 출세의 수단이 되고 ‘사이비 능력주의’를 부추긴다.
‘표절 유혹’ 피하고 창작 인정받으려면…
화가 폴 고갱은 “예술은 표절 아니면 혁명”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표절과 창작 사이가 늘 명확히 구분되는 건 아니다. 창작이란 대개 현존하는 지식이나 작품에 자신의 경험과 생각, 또는 영감을 보태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창작의 한계 때문에 자칫하면 표절의 유혹에 빠지게 된다. 교육부 판정 기준도 느슨해 연이어 6단어 이상 표현이 일치해야 표절로 본다.
“내가 더 멀리 볼 수 있었다면, 그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작 뉴턴의 말로 유명하지만, 12세기에 이미 프랑스 철학자 베르나르가 비슷한 말을 했다. 그도 실은 ‘원조’가 아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은 거인이자 맹인인 오리온의 어깨 위에서 난장이 케달리온이 길을 인도하는 장면을 그렸다. ©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이 대목에서 학생들에게 웨스트라이프의 ‘유 레이즈 미 업’(You raise me up)을 들려준다.
난 강한 존재죠, (I am strong)
당신의 어깨 위에 있을 때. (when I am on your shoulders)
당신은 날 일으켜 세우죠, (You raise me up)
더 강해질 수 있도록. (to more than I can be)
뉴턴과 베르나르의 말도, 웨스트라이프의 노래도 창작이지 표절이 아니다.
이렇게 신화와 철학과 과학과 음악과 미술은 영감을 주고받는다.
그래서 <서양미술사>를 쓴 곰브리치가 “우리는 모두 그리스의 제자”라고 말했던가? 우리 동양인은 그의 ‘우리’에 포함되지 않지만.
내 인생에서 만난 두 갈래 길들
이어 고별사를 하면서 인용한 시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었다.
단풍 든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몸이 하나니 두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한참을 서서
낮은 수풀로 꺾여 내려가는 한쪽 길을
멀리 끝까지 바라다보았습니다
(중략)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지으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고
내 인생에도 두 갈래 길이 여러 번 있었다.
인문계 고등학교와 대학으로 진학해 문학을 하고 싶은데 아버지는 철도고등학교에 진학하라고 강요했다. 철도고는 전원 국비장학생이어서 6남매 자식을 둔 아버지의 궁여지책이었다. 나는 몇 끼 단식 끝에 인문계 고교에 들어갔다.
해군장교로 제대한 뒤 럭키금성그룹에 입사했더니 신입사원인데도 구자경 회장 연설문 초안 쓰는 일 등을 맡겼다. 원래 계획대로 유학을 가려고 6개월만에 사표를 냈더니 고위직에 있는 분들이 너무나 아쉬워했다. 그러나 언론사에 나이 제한이 있던 시절 <조선일보>가 대학원 졸업자에 한해 만 30세까지 응시자격을 주길래 입사했다.
<한겨레신문>이 태동하자 미련없이 사표를 던지고 창간요원으로 참여했다.
퇴직금과 연말 보너스 전액으로 <한겨레> 주식을 사서 기자 중에는 주식이 제일 많았다. 그러나 삼성의 자동차 진출과 이건희-이재용 부자의 불법증여를 비판하다가 삼성과 ‘잘해보려던’ 경영진 눈 밖에 났다. 끝내 경제부장 직에서 쫓겨나자 사표를 던졌다. 유학을 준비하겠다고 하자 마누라는 격려를 하면서도 뼈아픈 농담을 했다.
“당신은 왜 돈 안 되는 곳으로만 옮겨 다니느냐? 당신 연봉에는 반감기가 있다. 이젠 연봉 제로 실업자까지 되고…”
마누라는 6년간 케임브리지에서 외국 유학생 하숙을 치며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달포 전 다시 두 갈래 길에 섰다. 내게 남은 마지막 언론개혁 수단으로 언론인 양성에 몰입하고 있는데, 국회 과방위 소속 의원이 민주당 몫 방송통신심의위원 자리를 제의한 것이다. 그러나 거절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지금 남에게 떠맡길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내 인생의 시시콜콜한 뒷얘기들을 종강 때 다 하지는 않았다.
나는 실은 여섯 번이나 사표를 내고 고위공직 제안을 거절한 적도 여러 번 있었지만 학생들에게는 중요한 이야기가 아닐 테니까. 때로는 나의 선택이 아닌 적도 있었지만 그것조차 내 운명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내가 학생들에게 강조한 것은 “긴 인생을 살다 보면 인생의 두 갈래 길은 결국 만나더라”는 얘기다.
“두 갈래 길에 설 때마다 돈 문제를 고려대상에서 빼면 가야 할 길이 보입니다. 한번 사는 인생인데, ‘위험해 보이는 선택’이라고 주저하지 마세요. 언론인들이 권력과 돈, 그리고 세태에 너무 쉽게 순응하면서 우리 언론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겁니다.”
시인이나 소설가는 되지 못했지만 미국 잡지 <뉴요커>가 추구하는 ‘문학적 저널리즘’을 가르치면서 흉내라도 내고 있고, <조선일보>에 입사하면서 포기한 유학도 가게 됐다. 중학생 시절부터 문학을 하고 싶도록 유혹한 이는 시인 이육사였다. 내 고장도 안동이었고 7월에는 청포도가 익어갔다. 근데 의문을 품은 구절이 있었다.
‘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아니, 우리 고장에는 바다가 없고 돛단배도 없는데?’
철들어 생각해보니 현실에 없기에 꿈꿀 수 있는 거였다.
현실에서 엇비슷하게 이루어진 것은 또 있다.
우리 집에서 눈뜨면 하늘밑 푸른 바다가 열리고 신양포구에는 돛단배 대신 윈드서퍼가 곱게 밀려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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