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망설이는 사랑

닭털주 2023. 12. 19. 08:03

망설이는 사랑

입력 : 2023.12.04 20:29 수정 : 2023.12.04. 20:30 변재원 작가·소수자정책연구자

 

 

안희제 작가는 망설임 속에서 사랑의 본질을 찾았다.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할수록 거칠게 행동하지 않고 쉬이 움직이지 않는 채 망설일 수밖에 없다는 것. 단정적인 모습이 아니라 망설이는 모습.

그가 말하는 사랑의 숭고함과 어려움은 모두 망설임에 있었다.

 

한 해를 마감하는 요즘, 크리스마스 노래가 일찍이 울려 퍼지는 카페에 앉아 허브차를 두 손 가득 꼭 껴안고 지난날을 돌이켜보았다.

그러던 중 문득 나를 향해 기꺼이 망설여준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망설이는 인연들은 상대가 어려움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기꺼이 함께 속을 태우는 표정을 나누곤 했다. ‘이렇게 저렇게 처신하라는 즉각적인 처방 대신 힘겨운 대화를 끝까지 청하고야 마는 사람들. 망설이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의 고통을 감내하는 대화 속에서 불쑥 치솟는 짜증과 답답함을 인내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망설이는 사람들은 용감한 마음으로 단호한 말들을 절제할 줄 알았다.

 

망설이는 사람들은 세상을 이해하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세상 문제 앞에 그 어떤 간단한 해답도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

어떤 대안을 택한다는 것은 다른 대안을 포기한다는 선택의 한계를 이해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타인이 처한 곤경이 그저 개인의 잘못된 선택에서 비롯된 문제 때문만이 아니라, 사회적 한계와 맞물려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알았다.

망설이는 사람들의 오랜 지혜는 순간의 지식을 과신하지 않았다.

 

망설이는 사람들은 타인을 있는 그대로 무해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상대가 나의 주장에 따라 살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

누구도 누구를 소유할 수 없으며 타인을 숭고한 존재 그 자체로 이해하는 사람들.

그들은 망설이며 사랑했다.

망설임은 무관심한 마음에서 비롯되지 않고 깊은 관심으로부터, 우유부단한 행동에서 비롯되지 않고 적극적인 경청의 태도에서 비롯된 감정이었다.

사랑의 동기가 이진법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사랑의 표현이 이분법이 될 수 없음을 아는 이들만이 기꺼이 망설이는 사랑을 택했다.

망설이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쥐지 않고 바라보았다.

 

다가오는 연말, 저마다 망설이는 인연으로 기억될 수 있기를 바란다.

과거를 평가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게 일상인 12월의 관성에 젖기보다 한 해 동안 못다 한 망설이는 사랑을 나눌 수 있기를.

연말연시 모임에서 누군가가 당신에게 한 해의 아쉬움에 대해 말한다면 훈계하거나 교정하려 하는 대신 망설이기를.

누군가 당신에게 내년의 고민을 나눈다면 적절한 대답을 제시하려는 마음 대신,

망설이며 상대를 바라볼 수 있길 바란다.

용감함으로 단호함을 절제하고,

삶의 지혜로 순간의 앎을 과신하지 않으며,

타인의 삶을 쥐는 대신 바라볼 줄 아는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올해는 정말 길고 힘들었으니까.

우리 모두가 지쳤으니까.

자신을 향한 단정적인 말들의 포화 속에서 끝끝내 견뎌왔으니까.

마지막 30일만큼은 조금 더 망설이며 사랑할 수 있기를.

모든 것을 구별짓고 단정지으려고 하는 시대적인 조급함에 휩쓸리지 않은 채 망설이는 사람의 사랑이 부디 남아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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