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벽이 없는 도서관 [크리틱]

닭털주 2024. 2. 23. 16:51

벽이 없는 도서관 [크리틱]

수정 2024-02-21 19:00 등록 2024-02-21 16:26

 

강혜승 | 미술사학자·상명대 초빙교수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의 빅토리아 주립 도서관에서 글을 쓰고 있다.

1911년에 완공돼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는 돔형 지붕 아래 열람실 한가운데다.

5층 높이 팔각형 돔 천장의 480개 판유리를 통해 쏟아지는 자연광 덕에 문명의 빛을 한껏 받는 듯하다. 중앙의 사서용 팔각 책걸상을 중심으로 모서리를 따라 여덟 갈래로 뻗어있는 오크 책상 한곳에 노트북을 켜고 앉아 있자니 근대의 기록자라도 된 듯하다.

 

지금 여기의 현재성을 실감케 하는 건 찰칵찰칵 카메라 셔터 소리다.

각국의 언어도 주변에서 소곤거린다.

랜드마크인 이 도서관은 멜버른의 가볼 만한 여행지로도 첫손에 꼽힌다.

도서관이 관광지라니, 언뜻 이질적이지만 오랜 시간이 축적된 돔 구조 대형 건축물이 내뿜는 아우라는 관광객의 끊이지 않는 발길을 수긍케 한다. ‘그래도 도서관인데라는 의문은 남을 수 있다. 도서관의 목적성도 질문하게 된다.

 

도서관은 책이 있는 곳이다. 문자문화를 연구했던 고전학자 에릭 A. 해블록의 말을 빌리면 책은 그러니까 철(book)은 인류 문화를 묶어 냈다. 온전하지 못한 기억에 의존해 입에서 입으로 지식을 전하던 인류가 문자를 통해 문명을 꽃피운 건 믿을 만한 지식 저장소 덕분이었다. 인류의 중심 감각이 귀에서 눈으로 이동해 미디어 혁명을 말하게 된 이미지 시대의 출발점이 책이라는 얘기다.

 

도서관은 그런 책을 수집하고 보존하며 또한 제공한다. 한마디로 인류의 문화공간인 셈인데, 보존과 제공 어느 쪽에 방점을 두느냐에 따라 도서관의 성격은 크게 달라진다. 빅토리아 주립 도서관이 책 이용자는 물론 도서관 자체를 즐기는 남녀노소로 붐비는 이유는 이곳이 문화전파자를 자처하는 까닭이다. 텍스트를 통한 지식 저장 또는 주입만을 배움의 문화로 한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책 앞에서 진지한 자와 카메라 앞에서 즐기는 자 사이의 경계 없는 열람실에 앉아 있자니 엄숙주의가 도서관의 필요조건일까 싶다. 유무형의 벽이 많은 우리나라 도서관과도 비교된다. 일로 여가로 나라 밖을 다니며 많은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낸 개인의 경험치에 한정되지만, 한 번도 외국인 관광객이라는 이유로 도서관 이용이 불편했던 적이 없다. 공부하러, 자료를 빌리러, 휴식이 필요해서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반면 서초구에 자리한 우리 국립중앙도서관은 내국인에게도 벽이 많다.

대중교통도 쉽게 닿지 않고 본관까지 계단도 많은 하드웨어는

과거의 산물이라 치더라도 운영방식까지 회귀적이다.

우선 만 16세 이상으로 나이 제한이 있다.

회원가입을 해야 하고, 이용증을 발급받아야 하며, 개인 소지품은 소지할 수 없다.

공부에 필요한 필기류에 한해 투명 비닐백에 담아 들고날 때마다 검색대를 통과해야 한다.

이 정도면 최고 등급 보안시스템이다.

 

나이로 이용자를 나누고,

열람이냐 노트북 이용이냐 목적으로 나누고,

디지털이냐 종이책이냐 매체별로 나눠 온갖 물리적 벽을 만들고 정숙을 요구하며

우리 도서관이 보존하고자 하는 바가 궁금하다.

배움의 진정성에 대한 엄숙주의일까.

이용자를 관리하겠다는 행정 편의주의일까.

학문을 업으로 삼고 있지만 도서관에 벽이 필요한 이유를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