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젊게 늙어가는 시대를 위한 준비

닭털주 2024. 3. 9. 23:20

젊게 늙어가는 시대를 위한 준비

 

 

이제는 120살까지 건강을 유지하며 사는 시대를 긴 안목으로 조망해야 한다. 과거의 경제학 공식을 벗어나, 노동과 휴식, 직업과 취미, 경제활동과 사회적 기여 등 인간 활동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정립해야 하는 미래가 우리 안에 이미 와 있다.

 

수정 2024-03-07 18:53 등록 2024-03-07 18:29

 

 

노정혜 | 서울대 생명과학부 명예교수

 

 

정년퇴직이 내게 준 최고의 선물은 여유와 자유이다.

30여년간 시간에 쫓기며 일과 삶의 균형을 잡으려 애쓰다가 어느 틈에 직장을 벗어나니, 자유로운 일상이 축복처럼 다가왔다. 직장인들이 빠져나간 동네를 한바퀴 돌고 공원을 산책하다 보면 이전에 내가 누려보지 못한 호사스러운 여유에 새삼 감격하게 된다. 나는 언제까지 건강을 유지하며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골라 할 수 있는 노년의 여유를 즐길 수 있을까? 80, 90, 100?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22년도 출생아 기준 한국인의 평균 기대수명은 82.7세인데 병이 있는 기간을 제외하면 평균 65.8년을 건강하게 살고, 설사 병이 있더라도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주관적 건강수명은 72.2세라고 한다. 현재 60살인 사람을 기준으로 하면, 76.7세까지 스스로 건강하다고 느끼며 살 거라 한다. 고혈압과 고지혈증 약을 수년간 복용하고 있는 나도 스스로 건강하다고 느끼며 살고 있으니, 적어도 77살 아니 그보다 몇년 후까지도 건강을 유지하며 살 것을 기대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기네스북에 가장 오래 산 사람으로 기록된 프랑스 잔 칼망 여사의 122살 장수 기록이 1997년 이후 아직 깨지지 않고 있지만, 110살 이상인 초백세인(super-centenarian)이 전세계적으로 수백명 살고 있는 상황에서 앞으로 30~40년 뒤면 잔 칼망 여사의 기록도 깨질 것이란 전망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현재 90살에 도달한 노인들 중에 122살 기록을 깰 분들이 상당수 존재할 것이다.

 

오래 살고 싶지 않다거나, 오래 살면 안 된다는 주장들은 모두 노년에 급증하는 질병의 폐해, 그리고 이에 따른 가족과 사회의 부담을 전제로 하고 있다. 만일 건강만 받쳐준다면, 오래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암과 심장병, 치매, 당뇨, 폐질환 등 소위 노인성 질병의 발병률은 나이가 들면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30만명의 의료기록을 추적한 영국 바이오뱅크 데이터 분석에 따르면, 이들 질환의 발병률은 30살에 비해 70살이 되면 몇 배 정도가 아니라 100배 이상으로 모두 증가한다. 따라서 나이가 들면서 발병률이 급증하는 노인성 질병들의 심층적 공통 원인으로 노화를 지목하며, 노화 자체를 치료 대상으로 보고 치료제를 찾아내야 한다는 견해가 과학계와 의료계, 산업계에서 점점 힘을 얻고 있다.

 

특정 질병에 대한 치료제가 공인을 받으려면 환자들을 대상으로 효과와 안전성을 입증하는 다단계 임상시험을 거쳐야 한다. 노화에 대한 치료제가 인정받으려면 노인들을 대상으로 노화를 늦추거나 젊음을 회복시키는 효과와 안전성을 입증하는 임상시험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는 노화를 질병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노화를 표적으로 하는 임상시험 자체가 가능하지 않은 상황이다. 이러한 규제를 풀고 노화치료제에 대한 대규모 임상시험을 하려는 신청서가 이미 미국 식품의약국(FDA)에 제출되었다. 당뇨약으로 널리 쓰이는 메트포르민이란 약이 혈당을 낮출 뿐 아니라, 다양한 노화현상을 개선한다는 보고들이 축적되면서, 메트포르민을 노화치료제로 승인받기 위해 3천명 이상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해보겠다는 것이다. 만일 이 시도가 성공한다면, 노화 자체를 치료 가능한 대상으로 보고 치료제를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될 것이다. 또 다른 당뇨약 오젬픽이 살을 빼는 효과도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동일한 성분을 이름만 바꿔 위고비란 비만약으로 출시돼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예를 보면, 노화치료제에 대한 기대도 함께 커진다.

 

지난 20여년간 눈부시게 발전한 생명과학과 의학은 인간의 세포와 조직, 기관이 노화하는 메커니즘을 이해해 가면서, 노화를 지연하거나 역전시킬 방안들을 쏟아내고 있다. 만성 염증을 유발하는 노화세포를 제거하는 약이나 면역요법을 개발하고 있고, 세포의 노화시계를 되돌리는 재설계 방안을 여러 가지 형태로 제안하고 있다. 2012년 노벨상을 받은 야마나카 신야 교수의 기법을 따라 나이 든 성체세포에 3~4개의 유전자를 주입하여 0세에 해당하는 젊은 줄기세포를 만드는 기술은 재생의학의 기본이 되었다. 최근에는 이 기법을 적용하여 늙은 생쥐의 노화시계를 되돌려 젊게 만든 실험 결과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생쥐에게 적용된 유전공학 기법이 인간에게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겠지만, 포유동물의 노화시계를 되돌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입증된 이상, 인간에게 적용 가능한 방법을 찾는 경주는 이미 시작되었다.

 

지금 개발되고 있는 최첨단의 항노화, 역노화 기술과 치료제들은 앞으로 수년에서 십수년의 기간을 거쳐 시장에 나오게 될 것이다. 여기에 병행하여 손상된 장기를 인간 친화적인 동물의 장기나 인공장기로 교체할 수 있는 기술들도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

어쩌면 앞으로 20년 뒤에는 첨단 기술의 수혜를 입어, 매년 나이가 들더라도 생물학적으로는 1년씩 더 젊어져서, 잔여 수명이 줄지 않고 계속 늘어나는 사람이 출현할지도 모른다. 점점 가속도를 붙여가는 기술 발달의 속도를 고려할 때 2045년께 인공지능이 인류의 전체 지능을 능가하는 특이점이 온다고 예측한 레이 커즈와일은 그즈음에 인간도 생물학적 한계를 벗어나게 될 것이란 예측을 함께 내놓았다. 그의 예측이 맞으리란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그런 방향으로 과학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시점에서 인류의 수명이 어디까지 늘어날지 확언할 수는 없지만, 건강한 초백세인들은 점점 빠르게 더 많아질 것이다. 최첨단 기술의 혜택을 아직 보지 못하더라도, 건강한 노년을 실현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이 이미 많이 알려져 있으니, 이를 적극적으로 실천하여 건강수명을 늘려가는 노인들도 훨씬 많아질 것이다. 내년이면 65살 이상 고령자들이 우리나라 인구의 20%를 점하는 초고령사회가 된다. 고령이지만 병원 신세를 안 지고 건강을 유지하는 젊은 노인의 비율도 매년 늘어날 테니, 줄어드는 청년들을 대신하여 이들이 사회에 지속해서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발굴할 필요가 있다. 이제는 120살까지 건강을 유지하며 사는 시대를 긴 안목으로 조망해야 한다.

과거의 경제학 공식을 벗어나, 노동과 휴식, 직업과 취미, 경제활동과 사회적 기여 등 인간 활동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정립해야 하는 미래가 우리 안에 이미 와 있다.

'칼럼읽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돌고래 기사단을 생각하며  (0) 2024.03.12
서울시청의 궤변론자  (0) 2024.03.10
봄날, 나뭇잎 하나의 몽상  (1) 2024.03.09
주방을 책임지는 금속  (0) 2024.03.08
본능과 감정 그리고 이성  (1) 2024.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