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에 중독된 시대
입력 : 2024.10.20 20:32 수정 : 2024.10.20. 20:38 고미숙 고전평론가
나랏빚과 가계빚이 3000조원을 돌파했다고 한다. ‘조’라는 단위도 상상이 잘 안 되는데 거기에 또 3000이 붙으니 흡사 ‘신화적 상징기호’처럼 느껴진다. 아닌 게 아니라 빚은 도처에 퍼져 있다.
부자는 부자라서 서민은 서민이라서, 청년은 청년대로 중년은 또 중년대로.
결국 우리가 누리는 모든 물적 토대가 한낱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뜻인데, 생각만으로도 왠지 서글퍼진다.
빚이란 무엇인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빚에 담긴 의미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미래를 당겨 쓰는 것.
다시 말해 현재의 역량으론 실현 불가능한 물질적 혜택을 ‘지금 당장’ 누리고자 하는 욕망의 발로다.
다른 하나는 타인의 몫을 점유하는 것.
질량불변의 법칙상 내가 필요 이상으로 무언가를 누린다면 누군가는 그만큼 빼앗길 수밖에 없다.
전자가 시간적 엇박자를 의미한다면, 후자는 관계의 어깃장에 해당한다.
둘 다 삶에 치명적이다.
먼저 미래를 끌어다 살게 되면 시선이 늘 ‘저 먼 곳에’ 가 있게 된다.
‘지금 여기’의 현장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
그래서인가. 채무자들 가운데 빚을 차근차근 갚겠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계속 돌려막기를 하거나 아니면 그저 한방에! 해결되기만을 고대한다. 또 타인의 몫을 가로채는 데 길들여지면 타자와의 교감능력은 현저히 떨어지게 마련이다.
‘부채 콤플렉스’가 신체를 잠식하기 때문이다.
이때 나타나는 병적 증상이 바로 허언증 혹은 거짓말이다.
빚을 돌려막기하다 보면 말도 계속 ‘돌려막게’ 되고, 그것이 야기하는 혐오감은 주변관계를 다 초토화시켜버린다.
그뿐인가. 일상이 이런 패턴에 익숙해지면 몸엔 담음이 쌓이고, 마음은 쉴 새 없이 망동한다.
동의보감에선 이런 증상을 ‘음허화동(정(精)이 고갈돼 화(火)기가 치성해진다는 뜻)’이라 하고,
현대 의학에선 ‘염증수치’가 높아진다고 한다.
당연히 각종 질병에 노출된다.
불면증, 우울증, 암, 인지장애 등. 이 병들을 치료하려면 많은 비용이 든다.
또다시 빚을 내야 한다.
빚이 빚을 부르는 이런 경제구조를 고상한 말로 ‘금융자본주의’라고 한다.
20세기까지만 해도 집집마다 ‘빚지고 살지 말라!’가 가훈 혹은 유언이었다.
빚을 지면 절대 ‘인간답게’ 살 수 없다는 걸 사무치게 체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도래하면서 어느샌가 빚은 ‘능력’이 되었다.
금융자본의 ‘흑마술’에 걸려든 것이다.
너도나도 빚을 권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작금의 ‘버블경제’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금융자본의 논리대로라면 나랏빚이 느는 건 좋은 신호 아닌가?
그야말로 ‘돈 놓고 돈 먹는’ 경제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는 뜻이니 말이다.
새삼스레 ‘붕괴’ ‘위기’ ‘공황’ 운운하는 건 좀 생뚱맞아 보인다.
아마도 그럴싸한 미봉책으로는
더 이상 막을 수 없을 만큼 ‘버블의 민낯’이 드러난 탓이리라.
그 결정적 포인트가 바로 ‘영끌족’의 등장이 아닐까.
이 단어는 언제 들어도 충격이다.
영혼을 끌어다 빚을 내다니, 이건 존재 자체를 포기한다는 선언 아닌가?
막말 중의 막말이다.
금지어가 될 줄 알았는데, 웬걸! 어느샌가 우리말 단어사전에 버젓이 등록되어버렸다.
19세기 경제학자 존 러스킨은 오직 ‘부의 증식’만을 따지는 당대의 경제학을
“영혼 없는 인간을 가정한 경제학”이라고 맹비난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부’란 ‘생명’ 그 자체다.
“이 생명은 사랑과 환희와 경외가 모두 포함된 총체적인 힘이다.”
따라서 경제에서 영혼을 제거하면 ‘인간적 미덕’은 모두 증발해버린다.
과연 그렇다. 요즘 우리는 각종 미디어를 통해 그 생생한 현장을 목격하고 있다.
대출을 받을 때는 그토록 담대하면서 세금 앞에서는 부들부들 떠는 소심증 환자들,
빌딩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친구한테 밥 한 끼 편히 사지 못하는 인색한들,
편법과 비리를 무시로 자행하면서도 수치심이라곤 없는 ‘사이코 패스’ 공직자들.
저런 지경이면 거의 인격적 ‘변태’ 아닌가라고 생각했는데 오판이었다.
빚에 중독되어 영혼까지 탈탈 털어버렸으니 지극히 당연한 노릇인 것을.
역대급 무더위가 지나가고 가을이 왔다.
가을은 ‘숙살지기(가차없이 제거하는 기운)’의 시간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청명한 가을하늘이 열리기 때문이다.
살림살이의 이치도 다르지 않다.
빚을 짊어진 채 밝고 명랑한 일상은 불가능하다.
이 가을, 부디 청년들만이라도 ‘빚중독’에서 벗어나 ‘잃어버린 영혼’을 되찾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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