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두고 온 사람 [크리틱]
수정 2024-10-23 19:00 등록 2024-10-23 18:43
김영준 | 전 열린책들 편집이사
오래전 1년짜리 야간 과정을 수강할 때였다. 늦어도 오후 5시에는 회사에서 나와야 했다.
아무리 회사와 양해가 되었어도 바쁠 때 먼저 나오긴 쉽지 않았다.
다음날 출근해 보면 남보다 한 시간 먼저 나가느라 생긴 공백은 생각보다 큰 것 같았다.
가장 큰 문제는 그날 깜빡 잊은 연락이나 일들이 계속 떠올라 수업에 집중하기 힘든 것이었다.
왜 그게 회사에서는 안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것들을 필기 노트 뒷장에 메모한 뒤 쉬는 시간에 급한 연락을 처리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그런데 이렇게 몇주가 지나니 안 한 일은 있어도 생각 못 한 일은 없게 되었다. 점차 노트 뒷장은 다음 주, 다음 달, 내년에 할 일에 대한 메모로 채워졌다. 일을 앞지른 듯한 느낌은 꽤 만족스러운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때만큼 업무에 대해 많이 생각했던 적은 없다.
나중에 나는 후배 직원들에게, 5시부터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내일 할 일만 생각하라고 권하고는 했다. 물론 따르는 직원은 한 명도 없었다. 1분도 아쉬운 판에 어떻게 한시간을 노나? 그러지 못한 건 나도 마찬가지다. 야간 과정 듣던 시절의 희한한 능률은 기억으로만 남았을 뿐 결코 반복되지 않았다.
한시간을 억지로 배정한다고 업무를 ‘생각’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장소가 문제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회사는 워크숍이라는 것을 가는데, 일터가 아닌 곳에서만 가능한 논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도 개인 차원에서는 별 의미 없는 일이기 쉽다.
워크숍에 가는 게 하나의 추가 업무(준비도 고역인)로 여겨지는데 어떻게 업무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을까.
얼마 전 박문호 박사의 뇌과학 영상을 보는데 꿈꿀 때 몸이 따라 움직이지 않는 원리가 나왔다.
꿈속에서 걷고 있을 때 실제로는 발을 움직이지 않는 건 왜일까?
꿈꿀 때는 뇌와 신체 운동의 연결이 자동차 클러치를 밟듯 끊어진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꿈이 창의적입니다.”
나는 감명을 받았다.
꿈의 비밀만이 아니라 창의성의 정체까지 해명된 것 아닌가.
창의성이란 실행과 연결되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야간 강좌를 들을 때 나는 꼼짝 없이 앉아 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그건 회사 일을 하고 있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집이나 카페 등 다른 장소였다 해도 말이다.
이 이야기는 18세기 칸트의 학부 논쟁과 비슷한 것일지 모른다.
신학, 의학, 법학처럼 실행성을 가진 학문과 달리 철학은 실행과 아무 연결점이 없다. 하지만 철학은 그래서 자유롭고, 자유롭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칸트는 주장한다.
여기서 요점은 현실과 분리된 지식을 실제로 사회가 갈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꿈이든 아이디어든 창의성이든 뭐라고 이름을 부르든 말이다.
모든 노동자들은 머리를 집에 두고 출근한다는 농담이 있다.
여기서 머리는 창의성이다.
왜 회사에 머리를 안 가져올까.
답은 간단한데 머리가 하나뿐이라서가 아닐까.
근무 중인 노동자는 자동차나 기계를 운전 중인 사람의 상태와 비슷하다.
얼핏 머리를 안 쓰는 것 같지만 운전 중에 고도의 계산이나 창의적인 기획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 걸 시키고 싶다면 운전을 안 하는 자리로 바꿔 줘야 한다.
사실 꼭 남을 시켜야 되는 것도 아니다.
업무에서 면제되어 일을 창조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자리는 필요하고, 또 이미 존재한다.
그걸 경영자라고 하는 것이며, 그들이 자기 일을 잘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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