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최재봉의 탐문 _10 복수 -- 복수는 문학의 힘

닭털주 2022. 2. 15. 13:12

복수는 문학의 힘

 

최재봉의 탐문 _10 복수

 

 

 

분노란 누군가 우리의 인격 혹은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의 인격을 근거 없이 경멸했을 때 가지게 되는 복수의 욕망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썼다. 분노와 복수심은 아마도 사랑보다 강력한 유일한 정념이 아닐까. 세계 문학의 거장들이 다투어 분노와 복수를 다룬 까닭은 그 때문일 것이다.

 

파트로클로스여! 내 이제 그대를 따라 지하로 갈 것이오./ 하나 기상이 늠름한 그대를 죽인 헥토르의 무구들과 머리를/ 이리 가져오기 전에는 내 그대의 장례를 치르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그대를 화장할 장작더미 앞에서 트로이아인들의 빼어난 자제/ 열두 명의 목을 벨 것이오. 그대의 죽음이 나를 노엽게 한 때문이오.”

 

서양 문학사의 조종(祖宗)이라 일컬어지는 호메로스 서사시 <일리아스>의 한복판에서는 주인공 아킬레우스의 격렬한 분노와 복수의 외침이 울려 퍼진다. 그리스 연합군을 이끌던 아가멤논과의 갈등으로 자신이 전쟁에서 빠져 있는 사이 그를 대신해 전장에 뛰어든 사랑하는 벗 파트로클로스가 적장 헥토르에게 죽임을 당하자 그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 대목이다. 사실 이 작품의 배경인 트로이 전쟁부터가 트로이 왕자 파리스가 아가멤논의 동생인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의 부인 헬레네를 유혹해 도망친 데 대한 복수로서 시작된 것이었다.

오오, 복수로다!/ 도대체 나는 얼마나 못난 놈이냐! 참 장하구나./ 사랑하는 아버지의 참극을 당하고/ 하늘과 지옥이 복수를 재촉하는데도/ 창녀처럼 속내를 말로만 풀어놓고/ 그야말로 헤픈 여자처럼 저주만 하고 있으니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 역시 숙부에게 독살당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햄릿의 복수를 주제로 삼는다. 셰익스피어의 또 다른 작품 <베니스의 상인>에서는 자신을 모욕한 안토니오에 대한 유대인 상인 샤일록의 복수심, 그리고 그가 꾸민 함정에 대한 안토니오와 연인 포셔의 복수가 물고 물리며 이야기를 끌고 간다. 복수는 우리 고전 <춘향전>에서도 핵심 모티브로 구실한다. 거지 행색 이몽룡이 변학도의 생일잔치에서 쓴 시 금 술동이 속 향기로운 술은 일천 사람의 피요/ 옥쟁반의 맛난 음식은 일만 백성의 기름()”은 탐관오리를 향한 응징의 경고이자 자신의 여인을 탐했던 자에 대한 복수의 선언이기도 하다.

분노란 누군가 우리의 인격 혹은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의 인격을 근거 없이 경멸했을 때 가지게 되는 복수의 욕망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썼다. 분노와 복수심은 아마도 사랑보다 강력한 유일한 정념이 아닐까. 세계 문학의 거장들이 다투어 분노와 복수를 다룬 까닭은 그 때문일 것이다.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방대한 이야기는 주인공 서희가 조준구에게 빼앗겼던 땅을 되찾고 그간 당한 수모에 복수하는 기둥 줄거리를 둘러싸고 뻗어 나간다.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이 흰고래 모비딕을 향한 에이허브 선장의 복수심을 동력 삼아 전개된다면,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 <고백>은 어린 딸의 죽음에 대한 교사의 냉정하고도 잔혹한 복수담을 그렸다. 이스마일 카다레의 <부서진 사월>은 복수에 복수가 이어지는 알바니아의 관습법에 초점을 맞추었고, 정유정 소설 <7년의 밤> 역시 우발적 살인과 복수의 연쇄를 소재로 삼았다. 요나스 요나손의 소설 <달콤한 복수 주식회사>처럼 복수의 사업화 가능성에 주목한 작품도 있다. 백설공주, 장화홍련 이야기 같은 고전 설화들에서도 복수는 빼놓을 수 없는 주제로 등장하며, 무협소설에서는 부모나 스승의 원수를 갚고자 주인공이 무술을 연마하는 과정이 일종의 장르 문법으로 통한다.

우리의 논의에서 좀 더 흥미로운 것은 글쓰기의 출발점이자 동력으로 복수가 구실하는 경우들이다. 독일 작가 마르틴 발저가 2002년에 발표한 소설 <어느 비평가의 죽음>은 복수로서의 글쓰기의 한 사례로 적잖은 논란을 낳았다. 이 작품은 텔레비전의 문학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문단 권력으로 군림하는 비평가를 소설가가 살해하는 사건을 그렸는데, 이런 설정이 실제 독일 문학계의 황제로 일컬어지던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에 대한 작가 자신의 문학적 복수로 받아들여지면서 문단 안팎에서 거센 찬반 의견이 터져 나왔다.

하일지의 소설 <경마장 가는 길>의 주인공인 유부남 아르(R)는 프랑스 유학 시절 동거했던 미혼 여성 제이(J)에게 섹스를 조르거나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다가 그 어느 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자 마지막 협박을 들이민다.

나한테는 또 다른 한 가지 방법이 있지. 그게 무엇인고 하니 그건 바로 글을 쓰는 거지. 우리의 삶의 전모를 밝히는 글을 쓰는 거지. 그 글이 출판되고 나면 나는 얼마간 돈을 손에 넣을 수도 있겠지.”

그렇게 해서 아르가 쓰기 시작한 글이 바로 소설 <경마장 가는 길>이고 그 결과 그는 금전적 이득을 얻게 되리라는 사실을 예고한 것이지만, 여기에는 생략되어 있는 또 다른 측면이 있으니 복수로서의 글쓰기가 바로 그것이다. 자신과 제이 사이에 있었던 지난 일들(두 사람의 동거는 물론, 제이의 학위 논문과 문학평론 등단작을 아르 자신이 대신 써 주었다는 사실까지)을 폭로하기 위한 아르의 글쓰기란 문학으로 위장한 일종의 리벤지 포르노라 해야 하지 않을까.

<경마장 가는 길>은 물론 <어느 비평가의 죽음> 역시 흔쾌하게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복수로서의 글쓰기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박완서의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말미에서 주인공은 오빠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등 자신의 가족을 괴롭히고 파괴한 전쟁 체험을 두고 이렇게 다짐한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

이런 다짐에 이어 주인공은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을 곱씹는데, 40여년간 줄기차게 이어진 박완서 문학의 발원지가 바로 이 장면이라고 보아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 다짐과 예감의 장면에서 글쓰기를 통한 복수는 공동체에 대한 의무이자 개인적 구원으로서의 의미를 아울러 지니게 된다.

현실의 질서에는 자신이 굴복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으므로 이번에는 그 세계가 거꾸로 자신에게 굴하여 좇을 수밖에 없도록, 그 세계 자체를 아예 자기 식으로 뒤바꿔 놓을 수 있을 어떤 새로운 질서를 꿈꾸기 시작한단 말입니다. 좀 더 문학적인 표현을 빌려 말한다면, 자기 삶의 근거를 마련하려는 일종의 복수심이지요.”

이청준의 연작 단편 지배와 해방언어사회학서설 3’에서 작가 자신의 가탁이라 할 소설가 이정훈은 글쓰기의 동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현실에서 패배한 자가 그에 대한 간접적 복수로서 글쓰기를 택한다는 설명이다. 문학이 승자보다는 패자에게 공감하며, 현실의 질서가 아닌 다른 질서를 꿈꾼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이청준의 후배 작가 주인석도 소설 쓰기에 관한 선배 작가의 통찰에 동조한다.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라는 부제를 단 연작소설집 <검은 상처의 블루스> 곳곳에서 주인석은 패배자의 복수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거듭 밝힌다. “소설은 좌절한 의식의 소산이다”(‘사잇길로 접어든 역사소설가 구보씨의 하루 2’), “소설이란 진정하고도 완벽한 복수와 같다”(), “소설가는 반성시키는 반성가다. 그러기 위해 소설가는 실패해야 한다. 가난해져야 한다”(‘옛날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단다소설가 구보씨의 하루 1’) 등등. 연작의 마지막 작품은 제목에서부터 복수를 내세운 지옥의 복수가 내 마음을 불타게 한다이다. 모차르트 오페라 <마술피리>의 저 유명한 소프라노 아리아에서 제목을 가져온 이 작품은 12·12 쿠데타의 공소시효가 마감되는 19941212일 밤을 배경으로 삼는데, 여기에서 주인공인 소설가 구보씨가 쿠데타 주역들에 대해 꿈꾸는 지옥의 복수는 오직 소설의 형태로만 가능할 뿐이다. 이 책 말미에는 작가의 동갑내기 평론가인 이광호의 해설이 실렸다. ‘그대 아직 복수를 꿈꾸는가우리 세대의 구보를 위하여라는 제목을 단 이 글은 문학적 복수의 ()가능성과 복수로서의 문학의 영속성에 대한 요령 있는 설명을 담고 있다.

그것(=글쓰기)은 좌절한 자의 좌절의 한 형식으로서의 복수이다. 그 복수는 어쩌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거나 소용되지 않는다. 그러한 글쓰기를 통해 그는 그가 복수하려는 권력과 체제와 제도를 탄핵할 수 없다. () 그래서 엄밀하게 말하면 소설 쓰기로서의 복수는 복수 그 자체가 아니라 복수의 꿈이며, 복수의 꿈은 그를 끊임없이 소설 쓰기에 매달리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