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말년의 은총

닭털주 2022. 3. 2. 18:34

말년의 은총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

 

 

얼마 전 오랫동안 교분을 나눠온 후배가 세상을 떠났다.

()을 치른 지 한 달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데,

유난히 더 그렇게 느껴지는 까닭이 있다.

카톡의 대화 상대 가운데 첫 사별이기 때문이다.

가족이 계정을 없앤다 해도 그동안 오갔던 메시지는 내 폰에 고스란히 보관된다.

이제 대화를 나눌 수 없지만, 나는 차마 삭제할 수가 없다.

몸은 떠나갔어도, 마음속에서는 곧바로 결별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고인과의 대화방을 보존하는 이들이 많다.

 

20~30년 후 내 또래의 휴대폰을 상상해본다.

전화번호부에 통신이 종료된 이름들이 절반 이상이 될지도 모른다. 카톡방은 어떨까.

친구나 동문 모임처럼 신입 멤버가 없는 공간에서는 어느 시점부터 인원이 빠르게 줄어들어 마지막에 한 사람만 남게 될 것이다.

텅 빈 대화방에 저장된 메시지들을 바라보는 심경은 황량하리라.

아날로그의 세계에서는 망자가 서서히 잊히지만,

디지털의 세계에서는 있음과 없음이 0/1의 부호로 명확하게 구별되고 가시화된다.

사실 죽음은 한순간 찍히는 이 아니라 서서히 희미해지다가 사라지는 에 가깝다.

유병장수(有病長壽)의 시대에 그 선은 점점 길어진다.

죽음에 이르는 길이 갈수록 구불구불하고 아득해지는 것이다.

그 여정을 통과하는 모습은 천차만별이다.

어느 나이까지 비슷한 지위와 이력을 밟아온 사람들인데 생애의 끝자락에서 전혀 다른 처지에 놓인다.

경제적 여건과 건강이 중요한 변수지만, 결정적인 것은 인간관계다.

가족과 소통이 잘되는지,

또는 편안하게 어울리는 친구들이 얼마나 되는지에 따라 인생 막바지의 행복이 좌우된다.

한동안 자주 연락을 주고받던 지인이나 친구들 가운데 소식이 끊긴 이들이 있다.

주위에 수소문해봐도 추적이 되지 않을 만큼 완전히 두절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다가 몇몇은 사업 실패나 위중한 질환 등으로 두문불출하고 있음이

뒤늦게 알려지기도 하고,

세상을 떠나고 한참 지나서야 부고를 받게 되는 경우도 있다.

개인적으로 힘겨운 상황에 몰리면서 사회적 관계를 닫아버리는 심정을 이해할 만하다.

초라하게 스러져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이다.

수명이 늘어나면서 인생의 말년도 연장된다.

그것은 노년이 아닌 중년에 시작되기도 한다.

그 시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비참한 쇠락일 뿐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상실을 통해 비로소 삶의 깊은 진실에 눈을 뜰 수 있다.

심신의 나약함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정직하게 마주하면서 영혼의 진검승부를 펼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살아 있음의 축복을 누리면서, 시간의 밀도는 한결 충실해진다.

그런 점에서 말년은 더 커다란 존재로 나아가는 입구가 아닐까.

 

그 길목에서 우리는 새로운 자아를 만나고 진짜 친구들을 알아보게 된다.

저물어가는 인생의 곁에 있어줄 벗,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죽음 앞에 선 자화상을 비춰줄 이는 누구인가. 자신이 무의미하게 소멸한다고 느끼지 않을 수 있도록 존재를 지탱하고 증언해줄 수 있는 친구 말이다.

생사의 경계를 넘어서 온전히 연결되는 관계,

서로의 기억 속에서 시간의 향기를 빚어내는 인연이 소중하다.

오늘 우리가 나누는 디지털 메시지는 그렇듯 은총 가득한 우정의 기념물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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