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깊은 우물’
도재기 논설위원
고 이어령 초대 문화부장관. 경향신문 자료사진
고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1934~2022)은 100권이 훌쩍 넘는 책,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은 칼럼·평론을 남겼다.
평소 “책 읽는 게, 글 쓰는 게, 생각하는 게 좋다. 즐겁다”던 말 그대로다.
“뒷사람들이 갈증을 풀 수 있는 그런 깊은 우물 하나 파고 싶다”던
고인다운 결과이기도 하다.
‘시대의 지성’으로 불리던 그의 책과 글은 이제 우물 속 단물로 남았다.
그가 판 우물은 깊고도 넓다.
스물셋 청년 이어령은 ‘우상의 파괴’로 문단을 넘어 지식인의 정신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번쩍 일깨웠다. 지금도 지식인들에게 유효한 빛이자 소금이다.
경향신문 연재 글을 모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한국인·한국 문화를 제대로 발굴해낸 한국 문화론의 토대다.
일본인들을 놀라게 한 <축소지향의 일본인>도 있다.
그의 지적 탐험은 문학비평에서 한국 문화론, 동서양 문명론,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공존, 정보화시대를 넘어 인공지능(AI)과 생명화시대로 이어진다.
<가위바위보 문명론> <보자기 인문학> <디지로그> <생명이 자본이다> 등을 통해
동아시아·현대 문명의 한계를 극복할 대안도 찾는다.
그의 통찰은 지성과 영성, 생과 죽음이 등을 마주 댄 부조리한 삶으로도 확장됐다.
융합·통섭 인문주의자로서의 긴 여정 끝에 ‘이야기꾼’ ‘21세기 패관(稗官)’으로 자처한 그는 마지막까지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를 쓰는 중이었다.
이어령이 깊이 파낸 우물에는,
집필할 때면 “제단에 오르는 경건한 마음으로 옷깃을 여미었다”는 칼럼 ‘여적(餘滴)’도 있다. 경향신문이 창간한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이 칼럼에 그는 깊은 족적을 남겼다.
“군사정부 시절 고초를 당하기도” 했지만
“여적을 쓰던 그 기간이 내 생애 가장 화려하고 보람 있던 황금기”라고 회고한 바도 있다.
이어령 전 장관의 영결식이 2일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문화체육관광부장으로 엄수된다.
전문가는 많지만 시대와 세상, 삶을 밝은 눈으로 통찰하는 어른이 없는 시대다.
이렇게 또 한 어른이 가신다.
그의 통찰력과 지혜가 몹시 그리울 것이다.
그의 말을 더 듣고 지혜를 구했어야 하는데 아쉽다.
새로운 문명을 일궈내야 할 전환의 시대여서 더욱 그렇다.
이어령영결식경향신문여적지식인문화체육관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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