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인자하지 않아도 괜찮아

닭털주 2022. 6. 15. 16:06

[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인자하지 않아도 괜찮아

 

김은형 | 책지성팀 기자

 

 

얼마 전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돌아다니다 김훈 작가 사인회에 갔다.

줄이 생각보다 길지 않았는데 시작한 지 시간이 꽤 지나서이기도 했지만 진행이 초스피드였다. 뜨거운 팬심 고백도, 작가의 다정한 웃음도 없었다. 다정한 웃음이 없으니 뜨거운 팬심이 나오려다 만 것 같았다. 다만 독자가 내민 책에 작가가 자신과 독자 이름을 쓰고 돌려주는 행위의 반복이었는데 그 며칠 전 내가 쓴 그의 신작 소개 기사에 잘 봤다는 인사를 들을까 설렜던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심술맞은 노인네 같으니라고.’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이상한 쾌감 같은 게 느껴졌다.

작가와 독자가 만나는 장으로 바람직한 분위기는 아니겠으나,

푸근함, 따스함, 인자함 등 노년의 주인공이 등장할 때 으레 따라붙는 수식어가 없는 이 건조한 분위기가 되레 신선하게 느껴진 것이다.

내가 가진 노년에 대한 두려움 500개 중 하나는 인자함자애로움같은 거다.

주름살·탈모, 고혈압·당뇨 같은 말보다 더 무섭다. 뇌졸중, 치매보다는 안 무섭다.

비슷한 결의 말로 관대함, 친절함, 상냥함 같은 단어들이 있지만

인자함과 자애로움만 유독 노년에 붙는 형용사다.

자애의 뜻이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도타운 사랑’(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이기 때문일 터.

누구라도 그렇듯이 나도 인자한 할머니, 할아버지를 좋아한다.

하지만 나중에 내가 인자한 할머니가 돼 있을 거 같지는 않다.

내 애는 나만 예쁘고, 내 개는 나만 물지 않는다는 말을 인생의 금언으로 아로새기며 인사치레라도 친구 아이 머리 한번 쓰다듬어본 적 없는 나에게 환갑 됐다고 자애로움 따위 장착될 리가 없다.

중년의 반항심도 기어 나온다.

왜 인자해야 하는데? 인자하지 않으면 어때서.

인자하지 않다는 걸 못돼 처먹었다는 말로 이해해선 곤란하다.

인자함에는 국어사전에도 나오는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일방적인 베풂,

바꿔 말하면 아랫사람의 윗사람에 대한 기대, 요구, 강요가 담겨 있다.

청춘을 (윗세대가) 열정, 패기 따위의 말과 등치시키는 것과 비슷하다.

몇년 전 한 젊은 워킹맘의 육아기를 읽다가 입맛이 씁쓸했던 적이 있다.

남의 손에 맡기기가 못 미더워 시어머니에게 두 아이의 육아를 맡겼다는 저자가 책 속에서 시어머니에게 크게 화를 낸 적이 두번 있었다.

야근하고 집에 들어왔을 때 시어머니 친구가 놀러 와 있었던 일과

시어머니 맘대로 냉장고 정리를 한 일이었다.

아무리 시어머니라도 내 집에서 나의 양해 없이 행동한다는 것에 대한 불편함을 책에 썼는데, 이게 30대와 40대의 세대 차이인가 싶으면서도 저자가 이기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계약관계 이상의 헌신과 애정을 기대하면서

그 희생이 아래로만 흐르기를 바라는 인자함의 강요다.

 

나는 인자한 노인 대신 친절한 노인이 되고 싶다.

남들과 다른 모습을 가지고 태어나 살아가는 아이 어기와 가족의 분투를 그린 영화 <원더>에는 유명한 대사가 나온다.

옳음과 친절함 중 선택해야 한다면 친절함을 택하라.”

옳지 않아도 친절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사회학자 엄기호는 <한겨레21> 연재 칼럼(‘사건의 사회학지옥에도 우리를 살게 하는 게 있다’)에서 이렇게 썼다.

존재를 비참하게 나락으로 떨어뜨려 말살하는 이 (세상의) 무례함에 맞서는 것으로서 친절함은 서로의 존엄을 대하고 돌보고 돕는 태도를 말한다.”

그러므로 친절함은 인자함처럼 베푸는 쪽이 정해진 시혜적인 것도 아니고

다정한 웃음이나 말투 같은 매너도 아니다.

김훈 작가는 사인을 부탁하는 팬들에게 웃어주지 않았지만,

간단한 안전장비조차 없어, 제대로 지켜지는 규칙 하나 없어 노동자들이 죽어 나가는 산업재해 현장을 찾아다니며 현실을 바꾸기 위한 목소리를 낸다.

지난해 오스카를 수상한 윤여정 배우는 당시 케이(K)-할머니라는 기괴한 단어에 엮이면서 본인이 먼저 진저리 칠 명언록의 주인공이 됐지만 그가 남긴 건 명언이 아니라 <죽여주는 여자>(2016)라는 놀라운 노년여성영화다.

그는 이 영화에서 노년배우들 백이면 백 다 거부할, 파고다공원서 몸 파는 박카스 할머니 역을 하면서 노인의 빈곤과 존엄에 관해 질문한다.

나는 이 두 노년의 예술가가 해온 발언이나 작품이

이 무례한 세상에 맞서는 친절함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노력해야 하는 건 젊어서나 늙어서나 친절한 시민이 되는 것뿐이다.

나이 든 세대가 젊은 세대에게 시전하는 꼰대질만 질타할 것이 아니라

젊은 세대가 나이 든 세대에게 기대하는 인자함도 하루빨리 질타받고,

내 나이 환갑 되기 전에 사라지기를 간곡히 바라는 바이다.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