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입력 : 2022.07.28 03:00 수정 : 2022.07.28. 03:04 안호기 논설위원
누구나 틀릴 수 있다. 한참 뒤에도 뭐가 잘못인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가까운 친구나 부부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고 심하면 국가 간 전쟁이 발발하기도 한다. 자신의 신념이나 결정이 틀린 것으로 판명됐을 때조차 인정하기보다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현실을 왜곡한다. 이른바 인지부조화다.
“인간은 합리적 동물이라기보다는 합리화하는 동물”이라는 정의가 나온 이유다.
“내가 틀렸다”고 말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정부가 세금 깎아주는 내용의 세제개편안을 내놨다.
정부안대로 세법을 개정하면 세수가 13조1000억원 줄어든다고 한다. 세수 감소분은 대기업·고소득층 7조7000억원, 서민·중산층과 중소·중견기업 4조6000억원으로 추산됐다. 법인세와 종합부동산세, 상속세 등이 개편되면 대기업과 고소득층 세부담이 더 큰 폭으로 감소한다. 상대적으로 부자에 유리한 세제개편이어서 경향신문은 ‘부자감세’라고 비판했다.
세제개편을 총괄한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견해는 다르다.
추 부총리는 지난 25일 정부세종청사 기자실을 방문해 “세제개편은 고소득층에 혜택이 더 큰 게 아니라, 상대적으로 중하위층의 혜택이 더 크다”면서 “(법인세 개편은) 중소기업에 훨씬 유리한,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는 방향이다. 일방적으로 대기업 편향적인 세제개편이라 이야기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지난해 법인세 최고세율 25%가 적용된 대기업은 신고법인의 0.01%에 불과하고, 세율이 3%포인트 낮아지면 국내 최대 기업 삼성전자는 연간 1조5000억원가량 세금이 줄어든다. 종부세와 상속세는 자산이 많은 부자에만 해당된다. 그런데도 중하위층과 중소기업에 혜택이 더 크다고 하니 억지스럽다.
대기업과 부자 세금을 깎아주면 생기는 낙수효과(트리클 다운)를 기대한다고 했더라면 그나마 솔직해 보였을 것이다. 실제로 기재부 보도자료는 법인세 개정 이유에 대해 ‘최고세율 인하에 따라 사회 전반에 걸쳐 혜택이 돌아감’이라고 명시했다. 법인세 인하 효과를 100이라고 한다면 주주 배당(15%), 소비자 가격(17%), 종업원 임금(8.5%), 재투자(59.5%) 등으로 귀착될 것이라고 했다.
귀착효과에 대한 근거는 2008년 6월 조세연구원 자료를 인용했다. 10년이 훨씬 지난 해묵은 자료를 끄집어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당시는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첫해로 ‘세계 최고의 기업환경’을 조성한다며 규제완화와 감세를 밀어붙이던 때였다.
윤석열 정부는 14년 세월을 뛰어넘어 민간주도성장을 외치는데,
그 강도는 이명박 정부에 뒤지지 않는다.
엊그제 법무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친기업 정책 의지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윤 대통령은 “법무행정의 최우선을 경제 살리는 정책에 두기 바란다.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는 과도한 형벌 규정을 개선하라”고 지시했다.
부자감세에 따른 낙수효과는 여전히 논쟁 중이지만,
대체로 효과가 없다는 방향으로 결론나고 있다.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폴 크루그먼, 좀비와 싸우다>에서 부자감세 주장을 가장 지독한 좀비로 꼽는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는 <불만 시대의 자본주의>에서 “경제가 성장하면 모두가 이익을 얻는다고 말하는 ‘트리클 다운 경제학’이라는 미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두 석학뿐만이 아니다.
이준구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법인세율 인하가 투자의 획기적 증가를 가져올 것이라는 주장은 신자유주의자들이 만들어낸 허구”라고 단언한다.
뉴욕타임스의 필진 8명이 최근 ‘내가 틀렸다’는 릴레이 반성문 칼럼을 실었다.
크루그먼은 인플레이션이 이렇게 높을 줄 몰랐다고 했고,
3차례 퓰리처상을 받은 토머스 프리드먼은 중국에 대한 자신의 전망이 틀렸다고 고백했다.
예측할 당시와 현재 여건이 달라 ‘그때는 맞지만 지금은 틀리다’는 변명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인지부조화와 확증편향, 유체이탈 화법이 횡행하는 세태에서 전문가들이 반성문을 낸 것은 용기 있는 행동이다.
결과만 놓고 보면 과거 보수정권의 부자감세, 진보정권의 소득주도성장은 기대했던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정책 실패에 대해서는 아무도 반성하지 않는다.
실패를 인정하고 토론과 숙의를 통해 해법을 도출해야 그 전철을 답습하지 않을 수 있다.
정책을 집행한 정부는 정권 입맛에 따라 입장을 바꾸며 ‘영혼 없음’을 증명한다.
“지금은 맞지만 그때는 틀렸다”고 시인할 용기조차 없는 걸까.
정부세제개편안법인세종합부동산세상속세부자감세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뉴욕타임스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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