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철학책을 읽는 이유

닭털주 2022. 8. 8. 08:53

철학책을 읽는 이유

입력 : 2022.07.28 03:00 수정 : 2022.07.28. 03:01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벌써 30년이 훌쩍 지난 옛일이다.

대학 신입생으로 철학과에 입학한 후 처음 맞는 철학개론 시간이었다.

모든 학과가 수강하는 교양과목이었지만 대학 첫 강의인 데다 철학 전공생이었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수업을 기다렸다. 마침내 뚜벅뚜벅 강단에 선 교수는 첫 마디로 교탁을 가리키며 다짜고짜 이게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라고 질문했다.

강의실 안의 그 누구도 다 다른 형태로 교탁을 보고 있고, 고개를 돌리면 교탁이 여전히 거기 있는지 알 수도 없는데, 어떻게 우리는 그것을 교탁이라 부를 수 있으며, 도대체 교탁이란 것이 지금 여기에 있기는 한 것이냐는 질문이었다.

 

충격적이었다.

나중에야 그 질문이 우리 인식의 불확실성을 묻는 철학의 오랜 방식임을 알았지만,

그날의 경험은 그간 내가 믿던 것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느낌 자체였다.

나는 그날 두 가지를 배운 셈인데,

하나는 철학이란 경이에서 시작된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철학이란 모든 것을 의심하는 태도라는 것이었다.

과학 역시 이런 경이와 의심에서 출발하거니와,

어쩌면 앎을 추구하는 인간 정신의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인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우리 출판사 편집장이 <철학책 독서 모임>이라는 독특한 책을 썼다.

다른 출판사에서 책을 내서 살짝 야속한 마음이었지만, 한편 훌륭한 책으로 데뷔를 한 젊은 저자가 우리 편집장이라는 게 자랑스러웠다. 동료 편집자들과 수년간 진행한 편집자를 위한 철학 독서회에서 얻은 결과물인데, 그 깊이가 사뭇 놀라웠다.

10권의 철학, 인류학, 과학기술학 책에서 길어낸 생각과 서로 나눈 대화가 정갈하게 서술된 이 책에서 또 한 번 철학의 정신을 배웠다.

요컨대 철학의 출발점인 의심의 가장 마지막 도착지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이며,

여기서부터 타자에 대한 이해와 만남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주장이었다.

 

를 벗어나서 어떻게 타자에 이를 것인가는 철학의 핵심을 이루는 질문이다.

더구나 확장된 자아로서 공동체가 가졌던 동질성이 와해되고 다원화된 정체성들이 각자를 주장하며 갈등을 빚는 이 시대에, 타자에 이르는 길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정체성의 다원화와 집단 동질성 추구는 타자와의 단절이라는 문제에 직면한 이들의 서로 다른 반응일 뿐이라고 책은 설명하고 있었다. 둘을 화해시킬 수 있는 뾰족한 해법이 있을 리는 없다.

다만 이 책은 강압적 동질성이나 다원적 정체성 어느 한쪽이 아닌, 둘의 아이러니한 공존 속에서 느슨하고 우연한 연대를 통해서 새로운 연결의 가능성을 찾아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하고 있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성별, 경험, 조직에 속한 편집자들이 이 시대의 근본적 문제를 다루는 철학책을 통해 다름과 일치를 확인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이러하다.

왜 하필 그들은 이런 난해한 철학책을 함께모여서 읽고 이런 문제를 고민할까.

혼자 읽으면 안 되는가.

그러나 철학이란 그런 것이다.

읽는 것 자체가 실천인 공부.

그런데 오늘의 철학이 함께문제를 해결하라고 외치고 있으니, 그 말을 따라 함께읽기 시작한 것뿐이다.

 

최근 동국대 철학과가 존폐 기로에 있다는 소식을 뉴스로 접했다.

단 한 명뿐인 정교수가 곧 정년을 맞는데, 다른 여러 대학의 전례대로 학과가 폐지될 수순에 있다는 것이다.

대학이 죽었다는 산 증거라고 할까.

이미 지식의 수익사업체, 취업 준비학교가 된 지 오래인 대학에 기대하는 마음이 순진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대학조차 버린 쓸모없는 철학, 이 사회의 변종이 되어버린 철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대학 바깥에 여전히 있고, 이런 돌연변이들이 사회의 진화적 파국에 어떤 해답을 제시할지 누가 알랴.

의심에 가득 찬 비판적 변종들이 끊임없이 이 사회를 문제 삼는 기회를 대학이 제공하지 않으면 스스로 만들 수 있다.

철학책을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