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오리가 하는 말

닭털주 2022. 6. 26. 12:26

오리가 하는 말

 

김만권 |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조지 오웰의 <1984>은 여러모로 놀라운 소설이다.

<1984>빅브러더가 지배하는 전체주의 세계에 대한 경고로만 읽는다면 이 작품의 진정한 가치를 찾을 수 없을지 모른다. 오히려 그리 읽다 보면 우리가 사는 세계를 억지로, 혹은 어설프게 전체주의에 끼워 맞추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강조하듯 전체주의적 요소들이 있다고 해서 그 사회가 전체주의인 것은 아니다.

전체주의에 대한 고발이란 관점에서 벗어나 <1984>를 보면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소위 정치하는 엘리트들이 지니고 있는 이중적 인식이다. 오웰은 이런 이중적 인식을 이중사고’(doublethink)라고 표현한다. 이중사고는 빅브러더가 이끄는 당의 슬로건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서로 완전히 상반되는 것들을 아무런 모순도 없이 등치해 놓은 것이다.

대체로 전쟁은 평화를 지운다. 예속은 자유를 지운다. 정보가 없다면 힘을 잃는다.

그럼에도 <1984>의 엘리트들은 이런 모순된 것으로 인식을 흐린다. 이런 모순을 자각하지 못하는 이중적 사고는 2+2=4와 같이 당연한 이치조차 외면하는 데 이른다. 권력 유지를 위해 2+2=5와 같이 증명할 필요조차 없는 말을 진실이라 여기며 어떤 모순도 느끼지 않는다. 모순을 느끼지 못하니 부끄럼을 느끼지 못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이와 함께 우리의 주목을 끄는 또 하나의 대목은, <1984>의 엘리트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혐오를 동원하는 부분이다. 이 세계에는 당의 이익에 반하는 사람들을 공개적으로 혐오하는 혐오주간’(Hate Week)이 등장한다. 그뿐만 아니다.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존의 질서를 흔드는 이들을 공개적으로 혐오하는 ‘2분 혐오’(Two Minutes Hate)의 시간도 있다. 주인공 윈스턴은 이렇게 말한다. “2분 혐오가 끔찍한 것은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다. 저절로 거기에 휘말려들기 때문이다.”

최근 정권교체를 이룬 야당이 내로남불혐오논란의 중심에 섰다.

돌아보면 조국 사태로 인해 빚어진 공정성 논란 속에 내로남불 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중요한 배경이다.

그런데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의 자녀들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거의 흡사한 입시특혜 의혹을 받고 있다. 아들의 병역특혜 의혹은 덤이다. 이를 두고 당선자 쪽은 정호영은 다르다. 조민씨의 경우 명확한 학력 위변조가 확인된 사건이지만 정 후보자의 경우 범법 행위가 없어 다르다고 주장한다.

돌아보면 조국 전 장관이 후보자로 검증을 거칠 당시 조민씨의 경우도 의혹 수준일 뿐이었다. 검찰은 증거인멸이 우려된다며 장관 후보 청문회 이전에 압수수색에 들어갔다. 문제 해결의 최후 수단인 법이 먼저 개입해버리는 바람에 정치적으로 문제를 풀 기회조차 차단돼버린 경우다.

문제가 제기된 시점을 본다면 아무리 봐도 두 경우에서 선명한 차이를 볼 수 없다.

한편 대선 전후로 젠더와 세대를 갈라치며 혐오 논란을 일으켰던 야당의 대표는 장애인 이동권 문제를 두고도 혐오논란에 휘말렸다.

이동권 요구를 두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갈라 대립시키고, 장애인들을 사회적 약자도 아니면서 약자인 척하며 무리한 것을 요구하는 세력으로 몰아붙이며 혐오논란의 불씨를 지폈다. 야당 대표가 공개 신호를 주면서 많은 사람이 여기에 가세하는 걸 보며 우리 사회에 혐오주간과 비슷한 혐오의 시절이 시작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사태가 이런데도 야당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한차례도 혐오 발언한 적이 없다.’

이런 태도 역시 권력을 위해서라면 2+2=5라고 믿을 수 있는 엘리트 집단의 이중사고에서 나온다.

이런 이중사고를 두고 <1984>의 열성당원은 뿌듯해하며 말한다.

자네도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오리말’(duckspeak)이란 게 있어. ‘오리처럼 꽥꽥거리는 것을 뜻하지. 이건 두가지의 상반된 뜻을 지닌 재밌는 낱말 중 하나야. 적에게 사용하면 비난이 되고, 뜻을 같이하는 동지에게 사용하면 칭찬이 된다네.”

오웰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뱉는 것은 단어로 이루어져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는 말이 아닌”, 모순을 부끄러워 않는 이중적 사고를 가진 자들이 만드는 권력의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