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물불 가리지 않기

닭털주 2023. 9. 23. 22:46

물불 가리지 않기

입력 : 2023.06.15 03:00 수정 : 2023.06.15. 03:05 오은 시인

 

 

물을 마실 때마다 불을 생각한다. 불을 피울 때마다 물을 떠올린다.

물과 불, 이름은 비슷하나 성질은 전혀 다른 두 물질 말이다.

불 위에 물을 올려두고 끓이다 보면 불의 힘이 불끈 솟는 게 느껴진다.

타오르는 불에 물을 끼얹는 장면을 보면, 끓어오르는 것을 잠재우는 물의 위력에 새삼 놀란다. 4월이면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세월호 참사와 최근 캐나다 동부에서 서부로 확산한 산불 소식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물과 불의 위험성을 깨닫곤 한다.

사람이 사는 데 필수 불가결하지만, 잘 다루지 않으면 언제든 인류를 위협할 수 있다.

 

얼마 전, 각기 다른 자리에서 불같은 사람과 물 같은 사람을 만났다.

불같은 사람은 들고일어나는 사람이다. 정열, 용맹, 투지처럼 뜨겁고 강렬할 때 지지받는 불같음도 있으나 질투심, 욕망, 성미처럼 뜨거워질수록 자신과 주변인을 위협에 빠뜨리는 불같음도 있다.

 

불같은 사람은 자신이 있는 자리를 흥분과 열정으로 달아오르게 한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에 영향받지 않을 도리가 없다. 다만 그 불이 예기치 않게 꺼지고 말았을 때, 우리는 잿더미 위에 웅크린 사람을 마주해야 한다. 부싯돌 같은 손길을 기다리는 간절한 눈빛 앞에서, 여전히 그를 불같은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물 같은 사람은 마냥 유순할 것 같지만, 때때로 넘쳐흐르거나 말라버리기도 한다.

범람과 고갈 사이의 상태를 항상 유지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불이 물을 끓이기도 하지만 증발시키기도 하듯, 사람들 틈 속으로 파고들고 스며들며 물 같은 사람은 본래의 성질을 잃을지도 모른다. 물 흐르듯 할 적에는 거침없어도 물 건너가면 손쓸 수 없어진다.

물이 오를 때는 신나지만 물이 빠질 때는 한없이 처연해지기도 한다.

사회 물을 먹고 불순해지기도 하고, 외국 물에 길든 나머지 본류(本流)를 잊기도 한다. 액체 상태이기는 해도 처음의 물과는 전혀 다른 상태가 되었을 때, 변함없이 그를 물 같은 사람이라고 불러도 될까.

 

물과 불은 서로 용납하지 못하거나 맞서는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

물불은 비유적으로 어려움이나 위험을 이르기도 한다.

물불 가리지 않는다는 말은 위험이나 곤란을 고려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행동하다라는 뜻이다.

불같은 사람 둘이 만나면 협심하여 어떤 일을 거침없이 밀어붙일지도 모르지만,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을 놓치거나 빠뜨릴 수도 있다. 물 같은 사람 둘이 만나면 서로 배려하며 한 발 한 발 나아갈 수도 있지만, 상대에 의지하는 데 익숙한 나머지 촌각을 다투는 결정 앞에서 머뭇거릴지도 모른다.

어느 경우든 물불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한때 나는 물은 물끼리 어울리고 불은 불과 만나는 게 좋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는 어쩌면 우물이나 불길에 자신을 가두는 일일지도 모른다. 편한 상태에 길드는 일은 관성에 젖는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우물이 깊다고, 불길이 뜨겁다고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다. 다른 우물에는 무엇이 있는지, 불길 밖의 온도는 어떤지 헤아리지 않으면 자신이 몸담은 세계가 전부인 줄 알게 된다.

잠자고 있던 열정을 달구기 위해, 북받쳐 오르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물은 불을, 불은 물을 부단히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만남은 세상에 나와 다른 성질을 지닌 사람이 존재함을 깨닫는 과정이자

그와 어떻게 하면 어울릴 수 있을지 고민하는 길이기도 하다.

 

물불 가리지 않는다는 말을 이렇게 풀이해본다.

당장은 맞지 않아도 다양한 사람을 경험해보기,

내 입맛에 맞는 것이 아닌 그 상황에 걸맞은 것을 찾아보기,

회피의 자리에 직면을,

어쩔 수 없이의 자리에 기꺼이를 두기.

가열과 증발과 소화(消火)를 오가는 동안 물이 수증기가 되기도 하고 불이 재가 되기도 할 것이다.

이 또한 물불 가리지 않았기에 마주할 수 있는 새로운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