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마음과 이해심
입력 : 2023.09.20. 22:58 임경선 소설가
미대 지망생이던 내가 정치학 전공으로 진로를 바꾼 이유는 미국 뉴욕 공립 고등학교의 역사 수업에 반했기 때문이었다. 유태계 미국인 여성인 바바라 선생님이 이끈 그 수업은 오로지 토론으로만 이루어졌다. 고등학생들은 U모양으로 둘러앉아 그날의 주제를 갖고 찬반 그리고 중간자적 입장의 논지를 자유롭게 발언했고, 간혹 선생님은 조용한 학생들이 먼저 발언하도록 유도했다.
수업은 양쪽 입장의 논리에 대해 수긍할 만한 점을 평가하고 재고할 만한 지점이나 놓친 논점을 짚어준 후, 본 논쟁이 실제 역사의 흐름을 어떻게 바꾸어놓았는지에 대한 선생님의 강의로 마무리되곤 했다.
나는 그 수업을 통해 상황을 입체적으로 생각하는 일과 상대의 입장에 서서 바라보는 법, 공정함과 균형감각을 배웠던 것 같다.
가끔 그 귀한 수업이 그립다.
고작 고등학생이던 우리는 때로 옳은 주장도 했지만 주로 바보 같거나 외골수 같은 의견을 냈고, 근거 없이 남의 의견을 비방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토론이 누가 누구를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닌, 무지하거나 놓친 부분을 서로를 통해 알게 되고, 각자의 입장과 나와 다른 생각을 가능한 한 깊이 이해해보는 훈련임을 매번 강조했다.
우리는 섣불리 남의 입을 막거나 남을 내 편의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고.
어른이 되고 교실 밖 현실 세계를 마주하자 소싯적 바바라 선생님 같은 역할을 해주는 인물이 사회에서 매우 드물어 슬프다. 정치와 공공의 영역에 종사하는 분들이 상호이해와 조율에 앞장서주는 것이 이상적이겠지만 현실은 그들이 앞장서서 분열과 불통을 조장, 편 가르기와 대립을 통해 이득을 취한다.
현대사회에서 정치는 ‘타협’이거늘, 마치 혁명가처럼 이를 불순하다고 공격하는가 하면, ‘당신의 의견에 수긍하지만 이런 문제점도 있어’ 같은 건전한 회의를 표명하면 ‘너는 대체 누구 편이냐’고 물어뜯기 바쁘다. 그러니 사람들은 괴롭고 피곤해서 ‘내 앞가림이나 잘하자’며 점점 입을 닫는다.
이런 극단적인 경향은 근래 사적 영역에서도 엿보인다.
굳이 이렇게까지 문제를 키울 일인가 싶은 사안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공론화와 법적 조치까지 가는 일들을 지켜보며 안타까움을 느낀다. 인간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일도 처음에는 사소한 오해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말 못할 서운함을 가진 채로 한 번 더 어긋나는 일을 겪으면 그때 마음을 다치게 되고, 앙금을 풀기보다 ‘내가 아픈 만큼 너도 아파봐’라며 상대에게 상처를 준다. 하필이면 내가 ‘별로 좋지 않은 상태’에 있다면 더더욱 오해하고 분노할 준비가 된 셈이다.
화해를 시도한다면서 ‘내가 옳다’를 입증하고 설득하는 데 골몰하면 대화는 평행선을 그리게 된다. 화난 마음이 갈 곳을 잃으면 ‘내 편’이 되어줄 관중을 끌어모으게 되고, 갈등이 공론화되면 이젠 돌이킬 수가 없다. 당사자들끼리 해결할 타이밍은 놓치고, ‘내 편’에 어필하는 데에 더 애쓴다.
관중은 제 입맛에 맞게 상황을 편집해서 소식을 나르고,
각자에게 유리하지 않은 진실은 점차 왜곡되어 오로지 ‘나의 입장’만이 절대 선으로 뾰족하게 날을 세운다.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으니 싸움을 멈출 수도 없다. 끝장을 봐야만 한다.
물론 옳고 그름의 ‘정도’는 공정하게 판별되어야 마땅하겠지만 그와 별개로 나는 거기에 ‘마음의 상처’를 주고받은 정황이 있었다는 사실을 바라본다. 이유는 상관없고 누구의 상처가 더 큰지도 의미 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을 가슴 아프게 인지하는 만큼 상대가 받았을 마음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헤아려보려는 노력이다.
아무리 화가 나도, ‘저 사람 입장에선 이런 부분이 상처였겠다’라고 생각해보는 것.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에 야박하고 오로지 내 다친 마음을 돌보는 일에만 급급하면 그만큼 방아쇠만 쉽게 당겨지고 모두가 다친다.
내가 가장 중요한 세상이라지만, 나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 유명한 구절처럼, 사람들은 늘 내가 모르는 저마다의 힘든 싸움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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