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세는 따라야 하는가
입력 : 2023.09.22. 20:07 한민 문화심리학자
사람들은 대세를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꽤나 대세에 민감한 사람들이다.
특정 상품의 유행뿐만이 아니라 대학입시, 고시, 의대 진학, 부동산, 코인 열풍 등 한 시대를 풍미하고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강력한 대세들이 한국에는 많이 존재한다.
대세를 따르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
이는 심리학자 솔로몬 애시의 유명한 실험으로 증명된 바 있다.
애시는 7, 8명의 참가자들을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히고 선 하나가 그려진 종이를 보여주고, 잠시 후 서로 다른 길이의 세 개의 선이 그려진 종이를 보여주며 좀 전에 본 선과 같은 길이의 선을 고르게 했다.
이 실험에는 비밀이 하나 있는데 참가자들 중 실제로 응답을 해야 할 사람은 가장 마지막에 대답하는 한 사람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연구자(애시)와 짜고 사실과 다른 답을 하기로 약속한 이들이었다. 앞서 응답하는 사람들이 전혀 엉뚱한 답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실제로 응답해야 할 참가자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해하다가 나중에는 초조해했고, 결국에는 다른 사람들이 한 답을 따라 했다.
이렇듯 집단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대세를 따르는 현상을 동조(conformity)라고 한다.
다른 사람들 하는 대로 우르르 몰려가는 것을 집단주의 문화의 산물이나 한국인들 특유의 습성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 모양인데 동조는 서구 개인주의 문화에서도 일관성 있게 보고되는 인류 보편적 현상이다. 미국에서 실시된 애시의 연구에서 동조율은 무려 77%에 달한다.
동조가 나타나는 이유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집단생활을 선택했다.
개개인의 인간은 약하지만
무리로 있으면 그 어떤 맹수보다도 강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깨친 것이다.
수백만년 동안 진화의 역사를 거치면서
다수와 함께하는 것이 살아남는 데 유리하다는 것을 유전자에 새겼다.
불안하고 불확실한 상황일수록 동조경향성은 강해진다.
전쟁과 가난, 불안과 위기가 끊이지 않았던 대한민국에서 대세를 따르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던 것은 당연하다.
대학에 진학하고 고시에 합격하는 것이,
의사가 되고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이 그나마 확실하게 부자가 되고 계층을 이동할 수 있는 길이었기에 한국인들은 따른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경우에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애시의 실험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의 동조경향성은 전혀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은 방향으로도 나타난다.
그리고 집단에 대한 맹목적인 동조가 어떠한 결과로 이어졌는지는 인류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모든 동조가 잘못된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가끔 집단의 의견을 따르는 것은 지성인으로서 바람직한 행위가 아니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는데, 심리학개론을 잘못 배운 사람이거나 지식인 코스프레라도 하고 싶은 사람일 것이다.
동조가 늘 나쁜 결과를 초래했다면 애초에 인간에게 동조경향성이 나타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내가 대세를 따른다고 해서 대세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손가락질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다수의 행동에 동조하는 것이 집단 전체의 생존과 관계없는 일일수록 그렇다. 예를 들면, 개인이 어떤 삶을 선택하느냐 같은 주제다. 비인기 전공으로 대학원을 진학하면서 필자는 굶어 죽으려고 인문학을 하느냐는 소리를 참 많이도 들었다.
대세를 따르는 사람들의 말만 들으면 한국의 인문학은 예전에 죽었고 이공계도 이미 가망이 없으며 예술을 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그런 말들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도 이해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불확실한 현실에서 대세를 따르지 않는 이들을 비난하는 것은 약간의 심리적 안정을 더해줄지 모른다.
세상에는 대세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냥저냥 있는 게 아니라 일정 비율 꾸준히 존재해 왔다.
솔로몬 애시의 실험에서도 끝끝내 자신의 견해를 지킨 23%의 사람들이 있었다.
어떤 집단에서나 20~30%의 사람들은 대세에 따르기를 거부한다.
사안의 옳고 그름을 떠나 대세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집단의 생존에 있어 중요한 시사점을 갖는다.
100%의 의견 일치율을 가진 집단이 잘못된 선택을 한다면 그 집단은 절멸할 것이다.
그러나 다수가 잘못될 경우에도 20~30%의 생존자들이 남아 있다면 집단은 영속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대세에 따르지 않는 이들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존재가 누군가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면.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것이 결국에는 집단 전체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길이 될 수 있다.
지금처럼 불확실성이 높은 현실에서는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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