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배우는 어떻게 나이들어가는가
김은형|문화부 선임기자
한달 전 40주년 회고전을 여는 정지영 감독 인터뷰를 하던 중 정 감독에게 전화가 왔다.
그날 저녁 열릴 개막식에 참석하겠다는 배우 안성기의 연락이었다.
‘남부군’ ‘하얀 전쟁’ ‘부러진 화살’ 등 정지영 감독의 주요 작품에서 주인공을 연기한 안성기는 정지영 회고전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하지만 정 감독은 긴 시간 혈액암 투병을 해온 안성기의 건강이 염려돼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랬더니 안성기가 직접 연락해 오겠다고 한 것이었다.
안성기는 같은 식으로 1년 전 이맘때 열렸던 배창호 감독 데뷔 40주년 특별전에도 참석했다. 그때 얼굴이 붓고 가발을 쓴 모습으로 나타나 암 투병 사실이 세간에 알려졌다.
며칠 뒤 안성기 배우를 직접 만날 수 있었다.
이준익 감독 30주년을 기념하는 춘천영화제 특별전에서 영화 ‘라디오스타’를 상영하며 이 감독, 짝을 이뤘던 박중훈 등과 함께 관객과 대화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관객과의 대화를 보면서 조금 놀랐다.
얼굴은 혈색이 돌고 좋아졌지만 목소리나 움직임은 더디게 회복 중인 것으로 보였다.
관객의 질문에 답하는 목소리는 들릴 듯 말 듯 작았고,
말은 느렸으며 문장은 어렵게 이어지다가 중간에 서둘러 마무리됐다.
머릿속에 준비된 언어들을 운반하기에 그의 육신은 아직 충분하지 않아 보였다.
그 어떤 직업보다 전면적으로 육체를 세상에 드러내어 이야기하고 설득하는 연기자가 육체의 감옥에 갇혀있는 듯해 보였다.
게다가 안성기는 65년 동안 백편이 넘는 영화에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던 특별한 존재였다. 어쩐지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게 미안해졌다.
행사가 끝나고 스태프와 관계자들의 조촐한 축하 자리에 끼어 가까이에서 그를 지켜볼 수 있었다. 막국숫집에 차려진 음식들을 집는 손길에도 어려움이 느껴졌다. 항암치료 뒤 다시 자란 머리카락은 거칠거칠했고 음식을 나눠 먹으며 편하게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버거워 보였다. 그럼에도 그는 사람들의 이야기 한마디한마디에 귀 기울이며 예의 그 주름 가득 짓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가슴 한구석에서 뜨끈뜨끈한 기운이 올라왔다.
이런 단어를 책이나 영화 같은 매체 아닌 곳에서 떠올리긴 처음이었다.
써놓고 보면 분명 민망하겠지만 ‘위대함’이라는 단어 말고는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배우 안성기는 ‘거절 못하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영화계 많은 사람이 아쉬울 때마다 그를 찾았고 그는 생색 안나는 감투를 많이도 맡았다.
그가 유일하게 끝까지 거절한 자리는 보수와 진보정권을 막론하고 제안해 왔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 캐스팅도 마찬가지다.
이명세 감독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준비할 때 비중도 크지 않고 그가 맡아본 적 없던 악역을 제안했다가 제작발표회 직전 안성기의 고심에 찬 거절을 들었는데, 정작 제작발표회에서 “후배들과 함께하게 돼서 기쁘다”는 안성기의 말을 듣고 너무 기뻐 해운대 바다로 돌진했던 에피소드를 회고하기도 했다.
최근 모습을 보면서, 안성기는 거절을 못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나서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나서는 게 아니라 전부를 걸고 나선다.
나이 들고 병들어 어쩔 수 없이 스스로 추레하다는 생각이 머릿속 한구석에 자리 잡게 되면 나서는 게 꺼려진다.
의전이나 주변의 후광으로 초라해진 자신을 어느 정도 포장할 수 있는 자리를 고르게 된다.
찬란하게 빛나는 모습이 대중의 뇌리에 박힌 스타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배우 안성기는 누군가의 도움이나 포장 없이 자리를 찾아다닌다.
그것도 스포트라이트 받을 일은 별로 없지만
자신이 조금이라도 힘이 될 수 있는 자리를 찾아다닌다.
나이 들고 불편해진 몸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면서 그럴 수 있는 대중스타가
그 말고 또 있을까.
지금도 앞으로도 찾기 힘들 것 같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의 레드카펫에서 그를 만날 수 없어 서운했다.
송강호도 주윤발도 빛났지만,
위대한 배우란 어떤 존재이고 어떻게 나이 들어가는가를 많은 이들과 함께 보고 싶었다.
내년에는 꼭 만날 수 있기를, 위대한 배우 안성기씨!
문화부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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