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김유신 동상 칼끝이 가리킨 곳

닭털주 2024. 1. 10. 09:04

김유신 동상 칼끝이 가리킨 곳

 

생뚱한 남산, 방향 튼 경주모두 박정희 시절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서울 남대문에서 남산 쪽으로 한양도성길을 따라가다 보면 남산공원 들머리 인근에 김유신 장군의 동상이 서 있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에서 살짝 비켜나 있는 데다 나무에 가려 있어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지나치기 십상이다. 김유신은 설명이 필요 없는 삼국시대 신라의 영웅이지만 왜 여기 자리 잡고 있는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일제 때 조선신궁이 지어진 자리에 일본과 맞서 싸운 안중근·김구·이시영 동상을 세우고, 남산도서관 앞에 대학자인 이황과 정약용 동상을 조성한 것과 비교된다.

 

남산에 김유신 장군 동상이 선 사연

 

이 동상이 처음 들어선 자리는 여기가 아니었다.

서울시청 앞 태평로(지금은 세종대로에 통합) 삼성본관 인근 중앙분리대가 원래 자리였는데,

그곳 역시 생뚱맞아 보이긴 마찬가지다.

1961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친일 논란과 정통성 시비를 잠재우고 국가 통합의 상징물로 삼기 위해 역사적 위인들의 조상(彫像) 건립에 나선다. 1964년 광화문과 남대문 사이 도로 옆에 미대생들이 공동제작한 37기의 석고상을 설치했다가 때가 묻고 빗물에 훼손되자 철거하고 청동상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서울 남산공원에 세워진 김유신 장군 동상. (이희용)

 

1966811일 서울신문사에서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총재 김종필)를 발족하고 각계 인사 78명의 의견 조사를 거쳐 1968년 광화문 네거리의 이순신 장군을 시작으로 15기의 동상을 건립했다. 김유신도 6번째로 선정돼 1969923일 제막했다. 여당인 민주공화당의 재정위원장이자 쌍용그룹 회장 겸 동양통신(연합뉴스 전신) 사장인 김성곤이 건립비를 헌납했고 조각은 김경승이 맡았다. 김경승은 일제 말 전시동원체제를 선전하는 작품을 많이 만든 대표적인 친일 작가로 세종대왕, 안중근, 김구, 맥아더 등의 동상도 제작했다.

 

김유신 장군상은 투구와 갑옷 차림에 말을 탄 채 장검을 빼들고 호령하는 모습이고, 말은 두 앞발을 쳐들어 막 내달리려는 자세를 하고 있다. 기단과 좌대를 합쳐 높이가 11.3m로 큰 편에 속한다.

 

화랑정신으로 남북통일은 좋은데 웬 새마을정신까지?

 

동상은 북쪽을 향해 세워졌다. 남쪽을 바라보는 이순신과 마주 보는 자세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김유신 장군의 위업을 이어받아 민족적·시대적 과업인 남북통일을 이루자는 뜻을 담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작사 작곡한 노래 나의 조국’ 3절은 삼국통일 이룩한 화랑의 옛 정신을/ 오늘에 이어받아 새마을 정신으로라고 시작한다. 화랑정신과 새마을정신이 무슨 연관성을 지녔는지는 모르겠으나, 박 대통령은 경주에 화랑교육원을 세우고 무열왕·문무왕·김유신을 기리는 통일전을 건립하는 등 화랑정신 계몽과 김유신 현양 사업에 적극 나섰다.

 

그러나 시청앞 김유신 동상은 제막식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자리를 옮겨야 했다.

청량리역과 서울역을 잇는 서울지하철 1호선 첫 구간 공사가 1971412일 시작되자 이듬해 328일 철거돼 지금의 장소로 이전한 것이다. 불과 2년 반 만의 일이다.

19701012일 김유신 동상 바로 옆에 세워진 유관순 동상이 6개월 뒤 장충단공원 남쪽 남산2호터널 입구로 옮긴 것에 비하면 꽤 오래(?) 자리를 지킨 셈이다. 개발독재 시절에 벌인 일의 상당수가 이처럼 즉흥적이고 무계획적이었다.

 

박 대통령 지시로 동쪽 일본 대신 북쪽 향하게 된 칼끝

 

김유신 동상은 경주 황성공원에도 있다.

갑옷을 입고 말을 탄 자세는 똑같지만 칼을 더 높이 쳐들었고 말은 오른쪽 앞발만 올리고 있다. 높이가 9.7m에 이르는데, 나지막한 독산(獨山·27m) 정상에 자리 잡고 있어 더욱 우뚝해 보인다. 경주 조각가 김만술의 작품으로 1966430일 제막했다.

 

 

경주 황성공원의 김유신 동상.(경주시 제공)

 

이 동상의 운명도 기구하다. 1970년 여름 태풍 빌리가 불어닥쳐 칼에 금이 가자 경상북도는 보완 계획을 세웠다. 때마침 1973년 발굴된 천마총과 황남대총에서 안장가리개와 말다래 등 각종 마구(馬具)가 쏟아져나와 고증에 맞게 새로 제작하기로 했다.

 

19754월 경주에 들른 박정희 대통령이 이 동상을 보고는 김수학 경북지사에게 방향을 바꿔 세우라고 지시했다. 당초 일본이 있는 동쪽을 향하고 있었으나 통일을 염원하는 뜻으로 북서쪽을 가리키도록 해 197791일 준공한 것이다. 좌대 뒷면에 동판으로 붙여 놓은 건립문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중략) 동상을 다시 만들어 방향도 바꾸어 세우라는 분부를 받들어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이신 (중략) 온 겨레의 호국정신을 일깨우고 조국의 평화통일 과업을 이룩해 나가는 벅찬 앞길에 (중략) 멀리 북녘을 향해 우뚝 세우다.”

 

동상 방향 바꾼 2년 뒤 김유신 후손에게 총 맞은 박정희

 

그러나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어떤 호사가는 이렇게 말한다. 주의 김유신 동상을 북서쪽으로 향하게 했더니 평양의 김일성 주석이 아니라 서울의 박정희 대통령을 겨냥한 셈이 됐다고. 2년 뒤인 19791026일 박 대통령은 심복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김유신은 가야 김수로왕의 12대손인 김해 김씨이고 김재규는 신라 경순왕 후예인 김녕 김씨다. 하지만 김유신 할머니와 어머니가 신라 왕족이고 여동생은 무열왕비이며 둘째 아내 지소부인이 무열왕 딸이다. 김유신 둘째딸도 문무왕 후궁이 되고 맏딸이 낳은 외손녀는 신문왕비가 됐으니 김재규도 김유신의 후손(외손)이나 다름없다.

 

한낱 동상의 방향 때문에 역사의 물줄기가 바뀌었을 리는 없겠지만 시절이 하수상하고 세태가 1970년대로 회귀하는 듯하니 온갖 상념이 떠오른다.

 

* 필자 이희용은 연합뉴스에서 대중문화팀장, 재외동포부장, 한민족뉴스부장, 선임기자 등을 역임하고 한국언론진흥재단 경영이사를 지냈다. 저서로는 세계시민교과서등이 있다. 앞으로 민들레 문화모꼬지에 근현대사, 종교, 문화재 등의 분야에서 칼럼과 문화비평을 연재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