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지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한해가 되길

닭털주 2024. 1. 10. 08:07

지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한해가 되길

수정 2024-01-08 02:31 등록 2024-01-07 18:47

 

김인아 | 한양대 교수(직업환경의학)

 

 

10여년 전이었다. 스쿠버 다이빙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번아웃이었던 것 같다.

아무런 의욕이 없던 그때 푸르디푸른 바닷속에서, 태어나서 처음 마주하는 신기한 생명체들을 보며, 오롯이 자신의 호흡 소리에만 집중할 수 있는 그 순간이, 그 번아웃 시기를 넘을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런데 다이빙 로그 수가 쌓이면서 바닷속이 항상 평화롭지는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고여만 있는 것 같은 바다 같지만 다양한 방향으로 조류가 흐르고 그 흐름에 따라 사람도 물고기도 흔들리게 된다. 조류를 잘못 만나면 아무리 애를 써도 산호가 있는 섬 주위에서 멀어져 망망대해로 떠밀려 가거나 원래 가려던 방향의 반대편으로 휩쓸리게 된다. 아래로 흐르는 조류를 만나면 아무리 몸을 움직여도 더 깊이 내려가게 된다. 내가 뿜어낸 공기 기포가 눈앞을 하얗게 가리면 갑자기 두려워지기도 한다. 평화롭게 들이쉬고 내쉬던 호흡이 급박해지고 동료들과 떨어지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발차기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조류의 방향을 잘 읽고 그냥 그 방향대로 흘러가면 너무 쉽지만, 그러면 안 되는 순간들이다.

 

연말연시, 지난 한해를 돌아보며 아쉬움을 뒤로하고 희망과 행복을 기원하는 시기에

그 바다가 생각났다.

한 배우의 자살 소식도 있었고,

제련소에서 아르신 가스에 중독되어 숨진 노동자의 소식도 있었다.

간만에 틀어놓은 텔레비전 뉴스 자막으로

이곳저곳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다쳤다는 소식이 흘렀다.

가족들, 친구들, 동료들과 지나온 한해 수고했다며 격려하고

앞으로의 한해가 행복하길 기원하는 순간들에 애써 외면하고 있던 뉴스들이 흐르고 있었다.

 

높으신 사람들이 신년사를 발표했고 올해의 희망과 비전을 이야기했다. 모두가 바라보는 사회의 모습은 비슷한 것도 같고, 이야기하는 우리 사회의 위기와 어려움도 비슷한 것 같다. 그런데 말하는 희망이 진짜 희망인지,

말하는 개혁이 진짜 개혁인지 잘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같은 단어를 쓰지만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른 것도 같았다.

같은 단어도 누구를 위한 것인지 또는 누구에 의한 것인지에 따라 방향이 다른 것 같았다.

 

바닷속에서 반대 방향의 조류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주변을 잘 살피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가려던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떠내려가고 마는, 그런 흐름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숨이 가빠지도록 발차기를 한 것 같은데 조금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생각해보면 지난해 내내 그랬던 것도 같다.

무언가에 막힌 느낌이 들었고,

무언가를 열심히 한다고 해도 그게 앞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긴 한지 모르겠다는 회의가 들었다.

열심히 한 발차기가 어쩌면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한 것은 아닌지도 걱정됐다.

조만간 벌어질 수도 있는 일들로 숨이 턱에 차게 될 것도 같았다.

그냥 가만히 그 흐름에 휩쓸려 가는 것이,

냥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것이 편안할 것임이 분명했다.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로서의 회피는 당장에는 안정감을 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문득, 예전에는 뉴스가 되지도 않았을 노동자들의 사고와 죽음이 실시간 뉴스 자막으로 흐른다는 걸 깨달았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걸 어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노동자들이 죽고 다치는 게 한 개인의 운수 좋고 나쁨이 아니라, 사회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해결해야 할 공공의 문제가 된 것이다. 한 배우의 극단적 선택과 관련한 언론 보도에 자살보도 권고지침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늘었고, 연예인의 마약 관련 소식을 낙인이나 가십으로 소비하지 말아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있었다.

 

많은 사람이 주변을 살피며 조류의 방향을 읽도록,

회피와 방관으로 숨어들지 않도록,

숨이 턱에 차 지쳐 떨어지지 않도록,

흐릿하게나마 서로를 살피며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지난 한해 어떤 이는 조류에 맞서 정말 힘차게 발차기를 했을 것이고,

어떤 이는 발차기하며 버티다 지쳐서 살짝 밀려났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조류에 몸을 맡기면 안 되고, 각자 자리에서 버텨야 하지 않겠나.

지난 한해 그랬듯, 올해도 모두가 지치지 않고 버틸 수 있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