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넓은 집과 넓은 도시

닭털주 2024. 4. 4. 11:01

넓은 집과 넓은 도시 [크리틱]

수정 2024-04-03 19:02 등록 2024-04-03 18:19

 

임우진 | 프랑스 국립 건축가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한강을 덮은 물안개가 근사하다.

컨시어지 서비스로 배달된 아침식사를 마치고 출근 준비를 한다.

초고속 엘리베이터로 50층을 내려가 지하주차장에 세워둔 승용차를 타고 회사로 직행한다.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차를 세워두고 아파트 2층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아내를 불러 건물 지하의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하루를 마무리한다.

 

(생각나는 데로 갈겨썼지만, 충분히 있을 법한)

대도시 고층주상복합아파트에 사는 어떤 이의 일상이다. 럭셔리한 인테리어의 넓은 아파트, 멋진 전망, 호텔식 서비스, 엘리베이터만 타면 도달할 수 있는 갖가지 편의시설, 많은 현대인이 꿈꾸는 (이른바 0.1%에 해당한다는) 성공한 인생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런 삶이 더 흔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러 골목길을 내려가는데 옆집 할아버지는 벌써 일어나 집 앞을 빗질하고 있다. 마을버스 운전기사는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출근하냐 한마디 건넨다. 지하철 구내 빵집의 갓 구운 빵 냄새가 덜 깬 새벽잠을 위로한다.

업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동네 슈퍼에 들러 내일 아침거리를 사고,

동네 책방에 들려 책방 주인의 신간 추천도 받고,

비슷한 시간 퇴근한 아내와 새로 생긴 동네 일식집에서 식사 겸 가벼운 한잔 후, 집 앞 꽃집에서 화분 하나를 싼값에 흥정해서 집에 돌아와 하루를 마무리한다.

 

(역시 생각나는 대로 썼지만, 충분히 있을 법한)

도시 서민 동네에 사는 어떤 이의 평범한 일상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의 실제 생활일 것이다.

평범하고 좁은 연립주택, 골목골목 다양한 모습으로 성심껏 가꿔놓은 가게들,

걷기만 하면 만나고 말 건넬 수 있는 낯익은 이웃들, 보통 사람들이 실제로 사는 특별할 것 없는 도시 모습이다.

 

성공할수록 넓고 큰 집을 꿈꾼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돈을 벌면 그래야 할 것 같다.

다들 그러기 때문이다.

건설회사의 광고대행사는 부자들의 사회적 욕망을 점화하는데 성공했고, 대안으로 등장한 고급주상복합은 멋진 전망, 차별화된 서비스, 편의성을 무기로 지난 20, 성공이라는 인정을 갈구하는 현대 한국인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높고 화려하고 편리한 큰 집에 살수록 자신이 사는 도시는 점점 더 작아진다는, 보이지 않는 사실을 말하는 광고는 없다.

 

2006년 오스트리아 빈 대학 주거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고급주상복합 거주민의 만성 우울증 지수가 서민 동네 거주민에 비해 3배 이상 높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연구가 흥미로운 이유는 그 우울증 지수가 거주민이 접촉하는 우연하고 즉흥적인 도시적만남의 횟수와 정확히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는 것이다.

멋진 전망과 고급 서비스를 처음 접할 때 느끼는 만족감은 사실 얼마 안 돼 무뎌진다.

그 비싼 한강뷰를 보면서 매일 감탄하는 거주민은 없다.

경비원의 90도 인사에 매일 성공의 쾌감을 느끼는 사람도 없다.

주상복합이라는 큰집에 살게 되는 순간부터 실제로는 그 작은 세계에 자신의 일상은 갇히게 되고 그가 마주칠 수 있는 도시적 기회는 축소된다.

이 아이러니는 유럽의 많은 나라가 고도제한과 용적률 제한을 유지하면서 자동차로 움직이는 초고층 큰 집보다

보도로 연결된 작은 집이 모인 도시를 선호하는 숨은 뜻을 설명해준다. 이 집을 구매해 성공한 극소수 상류층(VVIP), 0.01%로 인정받으라는 상업광고에 현혹되지 않을 만큼만 집과 도시의 관계를 이해한다면,

길과 이웃으로 연결된 우리의 평범한 도시가 사실은 가장 넓은 집이란 사실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