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도로서의 마음
입력 : 2024.08.05 20:46 수정 : 2024.08.05. 20:47 최성용 사회연구자
일전에 한 선생님이 물었다.
“글로 읽은 저와 실제 보는 제가 많이 달라 실망하지 않았나요?”
그 순간에 명쾌한 답변을 하지 못했던 것이 지금도 아쉽다.
내가 그의 글을 좋아하고 그의 팬이 된 것은 단순히 그가 훌륭한 사람일 거라 믿기 때문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가 일상에서 어떤 모습을 하는지 알 만큼 가까운 사이도 아니다.
그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변을 얻게 된 것은 한 뮤지션을 ‘덕질’하면서였다.
지금은 내 ‘최애’가 된 그를 처음 목격한 공연에서 내가 인상 깊었던 것은 그의 ‘태도’였다.
당시 그는 사랑이라는 주제로 노래를 만들면서 사랑을 마치 지켜나가야 할 태도라고 정의했다. 갚기 어려운 깊은 애정을 알려준 팬들을 향해, 자신의 사랑의 태도를 계속 점검하면서 단어 하나하나 신중히 골라 말하고 노래했다.
그는 나에게 ‘마음’의 의미를 알려주었다.
한국어로 마음은 두 가지 용법으로 쓰인다.
짝사랑에 아파하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슬퍼한다.
무언가를 향해 몸과 마음이 열려서 통제되지 않는 그 마음을 보통 감정이라고 한다.
다른 한편 우리는 ‘마음먹는다’고 말한다.
먹는 마음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마음과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에토스’라고 불렀던 그것은
계속 지키고 고집하려는 태도로서의 마음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모든 인간이 비루하고 ‘찌질하다’는 걸, 자신이 결코 그 예외가 아니란 걸 인정하는 과정이다.
물론 그건 출발점이지 귀결점이 아니다.
누구나 지금의 자신보다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 선생님의, 그 뮤지션의 팬이 되었다.
괴로움과 상실을 견뎌내며 그것에 지지 않고,
자기연민에 잡아먹히지 않으면서 더 좋은 인간이 되려는 마음의 태도가 글과 노래에 서려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훌륭한 인간이 아니기에 좋은 인간이 되려는 노력이 빛난다.
팬이 된다는 건 그 고집스러운 마음의 태도를 알아보는 것이다.
알아보려면 사람을 읽어내는 일종의 문해력이 필요하다.
그 문해력은 스스로의 태도를 세우고 지키려는, 독자가 지닌 치열함에 비례한다.
삶에 정답은 없기에 누구나 삶을 대하는 자신만의 태도를 품고 살아간다.
각자의 고유한 마음의 태도는 타인을 이해하는 기준으로도 작용하기에, 어딘가 결이 비슷한 마음을 지닌 사람을 단박에 알아보게 만든다. 자신이 지키며 지향하는 마음의 태도로 살아가는 타인을 만난다면 그와 닮고 싶다는 열망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그 순간 그의 팬이 되어 버린다.
오늘날 ‘진정성’이란 단어는 철 지난 것이 되었다.
겉으로 보이는 행태와 관찰할 수 없는 속마음이 일치한다는 걸 어떻게 아냐며 냉소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성은 단순히 겉과 속의 일치가 아니라, 자신만의 마음의 태도를 세우고 지키려는 노력을 뜻한다.
거기에는 한 개인이 형성한 고유한 사상과 세계관, 자기성찰의 치열함이 함축되어 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의 사상과 마음의 깊이를 느끼고 읽을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누군가의 팬이 되고, 진정성을 지닌 정치인을 알아본다.
언젠가 최애의 공연에서 강렬한 질투심에 사로잡힌 적이 있다. 타인을 알아보는 일은 가끔 내가 세상에서 그를 가장 잘 안다는 착각을 가져온다. 나만을 바라봐 주기를 욕망하게 만든다. 그것이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는 최선을 다해 정갈한 마음을 유지한 채 눈앞의 팬들에게 노래하고 있었으므로. 그 깨끗한 마음의 태도는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고, 나는 그 모습을 닮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다.
진정성을 비웃는 시대에도 여전히 진정성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래서 멸칭처럼 통용되는 ‘팬덤정치’라는 말은 틀렸다.
탁월하고 훌륭한 것들은 오늘날 정치의 영역보다 차라리 서로가 서로의 팬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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