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사라지지 않은 지금도 그립다 [이주은의 유리창 너머]

닭털주 2024. 8. 25. 10:37

사라지지 않은 지금도 그립다 [이주은의 유리창 너머]

수정 2024-08-18 18:48 등록 2024-08-18 16:33

 

 

강홍구, ‘그 집-옷장’, 2010, 피그먼트 프린트, 잉크, 아크릴, 127×100.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

 

 

이주은 | 미술사학자·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괜스레 시적 낭만에 들뜨거나 목적 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건 평소 나답지 않았건만, 음반 가게 앞을 걸어 지나치려고, 버스 한 정류장을 미리 내려 본 적이 있다. 두 길 모서리 상가 1층에 있는 레코드판 전문점이었는데, 유리로 된 문에는 공연과 음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생계를 위해서라기보다는 그저 음악이 좋아서 가게를 차린 듯한, 희고 긴 손가락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 가게주인이 설핏 보였다.

 

춥지 않은 겨울이었고, 가게주인이 걸어놓은 조하문의 노래, ‘이 밤을 다시 한번이 거리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함께 밤을 지새웠던 연인도 없고, 떠난 경험도 없는데, 무언가 붙잡고 싶은 분위기에 사로잡힌 나는 막연히 상상했다. 나중에 레코드점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도 괜찮겠다고. 그날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가 긴 손가락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레코드점 자체가 아예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연인과 슬픈 사연으로 헤어지지는 않았다 해도, 되돌아보면 나의 삶도 수많은 이별의 파편으로, 크고 작은 상실감으로 가득하다. 알게 모르게 정들었던 물건이 구식이 되어 세상에서 사라지면, 그 물건을 둘러싼 그 시절의 분위기마저도 덩달아 구식이 되어 실제가 아닌 양 아득해져 버린다. 테크놀로지의 휘광을 입은 새로운 물건을 반기느라, 제대로 된 인사 한마디 하지 못하고 버리거나 방치한 물건이 셀 수도 없다. 그것들에 딸린 추억은 개별 저장소에 차곡차곡 정리하지도 못한 채, 어디로 흩어져버린 것일까.

 

얼마 전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의 어느 집이 이사 나가려는지, 그동안 쓰던 가구들을 버리려고 바깥에 모아 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아직도 이런 가구를 쓰는 집이 있나싶을 정도로 구닥다리였는데, 어릴 적 내 부모님 방에 있던 문갑과 비슷한 것을 본 순간 마음이 짠했다. 옛 물건과 우연히 마주치면, 깊숙이 파묻혀 꼼짝도 하지 않던 기억의 조각들이 자기 존재를 알리려고 요동치는 모양이다. 몇년 전 작가와의 대담 영상을 찍느라 만난 적 있던 사진작가 강홍구의 작품 그 집-옷장도 동시에 떠올랐다. 누군가 버리고 간 옷장을 찍은 사진이다.

 

작가의 설명에 의하면, 사진 찍은 이미지를 들여다보면 자신이 본 게 이게 맞나 싶다고 한다. 사진은 직접 봤던 인상과 달리, 지나치게 중립적으로 무덤덤하기도 하고, 애초에 발견하지 못했던 낯선 요소가 예상치 않게 부각되어 있기도 하단다.

이 사진에 색칠을 덧입힌 이유는 공사장에 놓인 자개장을 처음 본 그 인상을 살리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한때는 귀한 물건이었고, 쓰임새 있었고, 누군가의 내밀한 사생활을 감춰뒀던 자개장이 지금은 이렇게 내부가 텅 빈 상태로 공터에 홀로 남겨져 있는 것이다.

열린 옷장 문은 이 장소에 닥친 사건을 암시해 준다.

여기 있었던 것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강홍구는 사진이 지나간 순간을 만들어내는 속성이 있다는 것에 착안하여, 우리 주변에서 정말로 사라져 가는 것이 무엇인지 카메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는 도시 재개발 현장에서

기존 삶의 터가 급작스럽게 철거되어 사라져 버리는 장면이었다.

착공을 기다리느라 폐허처럼 변해버린 마을을 구석구석 거닐다가

그는 마치 화석을 발견하듯 옛 거주자의 물건을 찾아내 뷰파인더 안에 담기도 했다.

올해 5월부터 8월 초까지 그는 그동안의 사진들을 모아 서울 : 서울 어디에나 있고 아무 데도 없는 강홍구의 서울이라는 전시회를 가졌다.

사람은 없고, 공사장에 덩그러니 서 있는 주인 잃은 개나

맥락을 잃은 채 내팽개쳐진 물건만 있는 작품들은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킨다.

 

사실 노스탤지어의 핵심은 과거 자체가 아니라, 시간의 축적에 따른 상실감이다.

여기엔 경험, 추억, 신념 등의 상실이 내포되어 있다. 음악평론가 사이먼 레이놀즈가 쓴 레트로 마니아에 노스탤지어에 대한 언급이 잠시 나오는데, 본래 17세기의 의학자 요하네스 호퍼가 장기 원정 중인 스위스 용병의 병적 상태를 기술한 용어로, 향수병을 가리켰다.

집이라는 친숙한 공간에 대한 상실감이 오늘날에는 지난 시절에 대한 동경을 포괄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노스탤지어를 찰칵찰칵 소리와 함께 매초 간격으로 생산해 내는 기계도 있다. 지금 이 순간마저도, 곧 사라질 거라 믿게 하고 애틋하게 다시금 바라보게 하는 기계, 그건 바로 카메라이다.

'칼럼읽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폭염’ 디스토피아 서울 [시론]  (0) 2024.08.26
나이  (0) 2024.08.25
처서의 마법  (0) 2024.08.24
당신의 에어컨 뒤편  (0) 2024.08.24
햇빛과 생각과 기억에 관한 메모  (0) 2024.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