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에어컨 뒤편 [똑똑! 한국사회]
수정 2024-08-21 19:22 등록 2024-08-21 18:55
에어컨 실외기가 설치된 서울 중구의 한 건물을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조기현 | 작가
한여름 늘 시원한 바람과 함께한다. 집도, 사무실도, 카페도 에어컨이 뿜는 냉기로 가득하다. 이 많은 에어컨을 보면 앞에서 바람을 쐬는 사람이 아니라, 뒤에서 설치하는 사람으로 지내던 때가 떠오른다.
고2 때 담임선생님이 교무실로 불렀다. 담임선생님은 공부 안 하는 나를 직업반으로 보냈다. 선생님이 신청 서류를 쓰는 내내 ‘너는 대학 안 가도 되잖아’라고 하는 말에 기분이 상했다. 마치 내가 고등학생의 어떤 표준에 미달한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답답한 인문계 고등학교를 탈출하고 싶었던 나에게 직업반은 반가운 곳이었다.
1년 동안 기술을 가르쳐 자격증 하나라도 손에 쥐여주며 내보내는 곳이 직업반이었다. 내 전공은 ‘공조냉동과’였다. 구리 배관을 꺾었고, 가스용접으로 배관을 이어 붙였고, 연결된 배관에 냉매가스를 주입하며 시원한 공기를 만들었다.
1년 동안 반복해서 실습했다. 1년의 반복은 조금 허술해도, 조금 느려도, 조금 약해도 충분히 따라올 수 있게 이끌어준 시간이었다. 분명 자격증 취득의 기준이 있었는데도 모두가 같아야 한다는 표준의 압박보다, 각자가 차이 속에서 존중하며 차근차근 할 수 있다는 감각을 익혔다. 모두가 공조냉동기능사를 손에 쥐었다.
에어컨에서 나오는 시원한 바람 같은 미래를 꿈꿨다.
산업기사 자격증을 따면 더 좋은 대우를 받는다고, 오스트레일리아나 캐나다에 이민을 가면 높은 연봉을 받으며 일한다고, 여름에만 에어컨 설치와 수리만 해도 1년은 놀고먹는다고, 이 말들이 기술을 배운 우리를 안심시켜줬다. 자격증이 보험처럼 든든했다.
친구들과 실외기 공장에 취업했다. 작은 중소기업이기에 생산하고 출장 가서 설치하고 수리하는 일까지 다 투입됐다. 여름이 가까워지면 넘쳐나는 주문량을 쳐내느라 철야 작업을 해야 했고, 가뜩이나 더운 날 가스용접까지 겹쳐 체온은 더욱 올라갔다.
사람을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노동인데, 지독한 더위를 견뎌야 한다는 게 참 아이러니했다.
우리의 현재에도, 미래에도 시원한 바람은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했다.
10년도 더 된 일을 어느 때보다 더 곱씹게 되는 여름이다.
지난 13일 전남 장성의 한 중학교 급식실에서 27살 청년이 에어컨을 설치하다가 쓰러졌다. 쓰러진 사실을 어머니에게 알릴 때 회사 인사담당자는 이런 말을 했다.
“ㄱ씨가 평소 정신질환이 있었느냐. 위치를 알려줄 테니 애를 데려가라.”
청년은 1시간가량 방치됐고, 인근 병원에 이송됐지만 숨졌다. 기저질환은 없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고온으로 체온 측정이 불가했다.
사고 당시 장성의 최고 기온은 34.4도였다. 온열질환이 원인이었다.
청년은 자신이 고온으로 힘들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어느 사무실 공사 현장에 대규모로 에어컨을 설치하는 작업에 투입된 여름날이 떠올랐다. 몸을 절반으로 접고 실외기를 설치하는데 뒤통수가 뻐근하고 어지러웠다. 하지만 이미 십수년 이 더위를 견딘 선배들에게 더워서 힘들다는 말은 꾀병이나 다를 바 없이 취급됐다. 마치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이상한’ 것처럼 몰리는 분위기는 어려움을 쉽사리 말하지 못하게 했고, 나 또한 내가 노동자의 어떤 표준에 미달한 존재처럼 느끼게 했다.
청년은 죽지 않을 수 있었다.
그가 느낀 더위가 예외적이고 이상한 것처럼 취급되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에게 ‘정신질환’이 있느냐는 물음은 노동현장의 인간의 취약함에 대한 무시의 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현장의 생산량과 속도에 맞추지 못하는 노동자는 어떤 표준에 미달하는 것일까?
우리가 계속 생산량과 속도에 몸을 맞추는 노동자를 표준으로 삼으면, 우리는 현장에서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하는 방법을 잃게 된다. 내가 학교나 공장에서 배운 어떤 표준의 압박이 아니라, 직업반에서 실습하며 배웠던 존중의 감각을 계속 떠올리는 이유다. 책임자를 처벌하고 온열질환을 예방하는 시스템을 마련함과 동시에, 나의 상태를 말하고 너의 상태를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에어컨 뒤에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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