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리처럼 쓰기
입력 : 2024.05.21 20:28 수정 : 2024.05.21. 20:29 하미나 <아무튼, 잠수> 저자
우리집 앞마당에는 요즘 고사리가 자라는데 겨우내 존재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땅속에 잠들어 있던 고사리가 날이 따듯해지자 기지개를 켜듯 순이 올라오더니 한 줌 햇빛으로도 매일 무서운 속도로 잎을 펼친다.
지구 역사상 가장 오래된 식물 중 하나인 이 양치식물은 수학이나 기하학을 배운 것도 아닌데 잎 모양이 완벽한 프랙털 구조다. 고사리 잎 전체 모양은 잎사귀 하나하나의 모양과 매우 유사하고, 큰 잎에서 작은 잎사귀로 갈수록 같은 모양이 반복된다. 무한히 반복되는 프랙털 구조는 줄기가 갈라지고, 또 그 갈래가 갈라지는 아주 단순한 규칙에 의해 만들어진다.
고사리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끊임없이 반응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속도대로 자기 모습을 갖춰간다. 고사리는 아름답고 완전하다. 그럴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데도 그렇다.
나는 아침마다 고사리를 관찰하면서 조급함과 두려움 때문에 매일의 작업을 해치지 않으려 애쓴다.
다음 책이 제 모습을 갖추려면 필요한 시간과 에너지를 충분히 가져야 하니 인내심을 갖자고 스스로 다독인다.
글쓰기에 이토록 헌신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른 채로, 그 끝에 뭐가 있는지 모른 채로 그런다.
대체로 글쓰기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숙련되지 않은 문장이 아니라 자의식이다.
내 글보다 내 기대가 앞설 때 글쓰기가 즐거움을 잃고 괴로워진다.
손끝에서 피어나는 문장보다 머리가 앞서 글을 예측하거나 의도할 때 글이 자연스러운 맛을 잃는다.
시기마다 쓸 수 있는 글이 있고 그 시기를 지나면 되돌아가 같은 글을 쓸 수 없으므로
글쓰기의 매 시기를 존중할 필요를 느낀다.
고사리는 자신이 언제 새순을 틔울지 알지 못해도 때가 되면 피고,
자꾸 시선을 빼앗기는 프랙털 구조의 잎을 스스로 디자인하지 않았어도 그렇게 자란다.
다만 고사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간이다.
그 공간이 고사리가 자라기 적합한 환경이라면 더욱 좋을 테다.
어디서 자라느냐에 따라 잡초로 여겨져 뿌리 뽑힐 수도 있고
충분한 지지와 돌봄을 받으며 자기 가능성을 맘껏 펼칠 수도 있다.
왜 버즘나무처럼 커지지 않냐고,
왜 지빠귀처럼 지저귀지 않냐고 누구도 묻지 않는 곳이 고사리에게 필요하다.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싶은 것도 그런 것이다.
여러 글쓰기 스승을 만나며 글에 관한 다양한 가르침을 들어왔지만
사실상 창작자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올바른 장소, 알맞은 공간뿐이라는 생각이다.
곧 어떤 이가 표현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을 자유롭게 표현하도록 장려하는 환경이다.
공간을 운영하는 사람의 덕목은 사람들 안에 잠재된 씨앗을 먼저 알아보고 믿는 데에 있다.
내 창의력을 직접 피워내는 것은 즐겁더라도 고단함을 건너뛸 수 없지만
타인이 자신이 지닌 창의력을 피워내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즐거움만 있어 좋다.
꾸준히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그런 순간을 목격하는 행운을 누린다.
한편 성장을 쉽게 방해하는 방법도 있다.
타인의 시도를 조롱하는 것이다.
그럼 무대 위에서 떨고 있는 사람은 수치심을 느끼며 다시 시도할 용기를 잃게 된다.
이 일이 애초부터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누군가 내게 글쓰기를 하고 싶은데 조언해줄 말이 있냐고 묻는다면
당신 안에 창작자를 보호하라는 말을 하고 싶다.
그 창작자는 어린아이와 같아서 타인의 말에 쉽게 영향받고 쉽게 상처받는다.
아직 숙련되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가능성을 품은 당신 안의 창작자는 보호받아야 한다.
무엇보다 누가 해주기 전에 스스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고사리처럼 아름답고 온전해질 테니까.
창작 행위는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는 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삶에 창조자다.
이 점을 상기해보자면 이것이 비단 글쓰기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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