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그 중간에서…
오동진 영화평론가
영화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의 죄책감을 자극한다.
이런 얘기를 이렇게 재미있게 봐도 되느냐 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해야 할 일’은 희망퇴직과 정리해고에 대한 얘기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잘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르는 사람에 대한 얘기이다.
게다가 ‘자르는 사람들’의 고뇌를 담은 얘기이다.
자르는 행위와 고뇌라는 사변(思辨)은 서로 양립하지 않는다. 어울리는 말이 아니다.
지금껏 우리는 ‘자른다’ 혹은 ‘해고한다’의 행위자,
곧 사용자와 그들을 이용하는 자본가들은 인면수심의 인간들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영화 ‘해야 할 일’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
그들도 어쩌면 대다수의 사람들 모두처럼 자본주의의 혹독한 시련과 고통을 안고 살아가고 있으며
어쩌면 그 어려움이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자본가는 쏙 빠진 자본주의 노사 투쟁의 현장
마르크스-레닌의 교리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결국 자본가와 노동자가 격렬하면서도 폭력적인 충돌의 과정을 거쳐 결국 승리한 노동자들이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다고 돼있다. 그러나 약 100여 년 간의 지난 역사는 그 교조적 이론이 결코 성사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올바르지도 않았다는 것을 입증해 왔다.
자본가는 처음에만 싸우는 척 한다. 아니 처음에도 그러지 않았을 수 있다.
자본가는 결코 싸움의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싸움은 노동자와 노동자 간에 벌어진다.
사용자가 된 노동자, 그리고 그 사용자와 대립하는 (사용자로 올라가지 못한) 노동자들이 싸운다.
현장에서는 종종 사무직과 생산직 간에 싸움이 벌어진다. 이 싸움의 해법은 고차 방정식의 풀이와 같다. 어렵다. 이 문제는 O와 X로 답을 할 수 없으며 단답형도 아니다. 다분히 긴 서술형 답을 내놔야 한다. 매겨지는 점수 또한 그때그때 사회상황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는 현재 답이 없는 문제에 봉착해 있으며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 한참 어디인가에 고립돼 있는 것이다.
한양중공업의 촉망받는 대리 강준희(장성범)는 입사 5년 차에 인사과로 발령받는다.
인사과라면 모든 조직에서 감사과만큼 직원들이 싫어하는 곳이다.
사람들을 조사하고, 평가한 후 보직 해임 아니면 강제 부서 이동(대부분 한직으로 좌천), 그걸 한번 이상 하면 아예 자르는 일, 해고를 주 업무로 하는 부서이다.
강준희는 이전 부서의 상사인 장 부장(강주상)의 총애를 받았고 선배인 이상수 차장(김남희)과도 가깝게 지냈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이들 셋이 노래방에서 최백호의 ‘영일만 친구’를 부르며 강준희의 환송 파티를 하는 것이다. 최백호의 노래 가사처럼 이들 셋 모두 ‘바닷가에서 오두막 집을 짓고 사는 어릴 적 내 친구’ 마냥 ‘푸른 파도 마시며 넓은 바다의 아침을 맞고’ 싶어 한다. 이들 상하 관계의 우정과 신의는 매우 애틋해 보인다. 장 부장은 강준희를 ‘내 사위’라고 부를 만큼 아낀다.
하지만 그 모든 건 곧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한양중공업은 채권단의 압박에 따라 조직개편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는 곧 희망퇴직을 강제하고 정리해고를 단행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강준희 대리는 인사과에 새로 발령을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선배인 이동우 차장과 같은 부서 대리인 손경연 여자 사원, 배호근 부장, 그리고 인사과 전체 팀장인 정규훈과 함께 인사 태풍의 한 가운데로 뛰어 든다.
과거의 이상 버리고 ‘사용자’로 변신한 386세대의 부끄러움
강준희가 회사 밖에서 선배 기자를 만나는 에피소드의 내용이나 영화의 배경이 박근혜 탄핵 집회 때였다는 것, 그래서 곧 아내가 될 임신한 연인 재이(이노아)가 “우리도 집회에 나가 볼까?”라는 대사를 하는 것 등등을 보면 이들 모두 1990년대 중후반에 학교를 다닌, 사회 민주화 세대로 보인다.
이런 세대의 사람일수록 자본주의적 환경에서 변화한 자신의 상황에 대해 불필요한 명분을 갖다 붙이거나 변명을 하기 일쑤이다.
나도 한때 당신들처럼 약한 자를 위해 싸웠다는 것을 내세운다.
여전히 생각은 같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식의 옹색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 강준희도 회사 대출 5000만 원을 얻어 작은 집을 장만한 상태다. 선배 이동우 차장(서석규)이 그런 그에게 ‘너도 도망을 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말할 정도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다.
미국의 학생운동조직 SDS(민주학생회의 Students for Docratic Society)의 리더 톰 헤이든과 Yiphi(이피, 사회주의 국제청년당과 히피 연합 Young International Party and Hippie)의 수장 제리 루빈, 뉴 레프트(신좌파) 이론가 애비 호프만 등 1968년 후 미국사회 내 격렬했던 저항운동을 이끌었던 소위 ‘시카고 7인’도 나중에 다 변질해서 자본주의 주류로 스스로 편입했다.
프랑스의 68세대, 미국의 60~70년대 반전세대, 일본의 전공투들, 독일의 바더 마인호프들, 그리고 한국의 386(또는 586) 모두 과거의 이상을 버리고 자본가들이 내세우는 ‘사용자’로 변신했다.
흔히들 모든 정치는 실존의 기반 위에 있다고 말한다. 그 정치적 실존은 매우 구체적인 서사(敍事)를 통해 실현돼야 한다. 구체적인 이야기란 강준희가 겪는 것처럼 차가운 현실 인식과 뼈아픈 성찰, 삶의 수치를 알아가는 과정을 말한다.
사랑하는 여자와 막 동거를 시작한 주인공 준희는 자신이 회사 인사과에서 하는 일을 연인에게 얘기하지 못한다. 그러던 준희는 결국 그간 자신이 하는 일을 얘기하지 못했던 것은 너무 바빠서도 아니고, 너를 무시해서도 아니며, 단지 부끄러웠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이 ‘진술’로 둘의 관계는 해빙된다.
수치스러움 속 존엄성 지키려는 노력이 자본주의 생명선
자본주의의 생명선은 어쩌면 각 개인이 처한 수치스러운 생존조건에 대한 깨달음, 그 한 가운데 서있음을 고백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엄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유지될 수 있다.
영화 ‘해야 할 일’의 감독 박홍준이 한 인사과 대리 사원의 고통스러운 정리해고 작업의 일지를 보여 주며 궁극으로 얘기하고 싶어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 영화는 결코 자본가나 사용자들을 옹호하려 하기 위함이 아니다.
반면에 비현실적인 노동자 사회의 건설을 강조하기 위함도 아니다.
이 아픈 각성의 바느질 같은 현실 인식이 꽤나 뼈아프다.
영화에서 주인공만큼 인상적인 인물은 인사과 팀장 정규훈(김도영)이다. 팀장으로서 그의 고민은 상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전조련(전국조선노조연합) 회원들을 상대할 때는 의도적으로 얼굴을 싹 바꾸는 인물이다.
전조련 측이 “우리 같은 사람, 다 자르면 누가 일을 합니까?”라고 할 때 팀장은 “남는 사람들이오!”라고 맞받아칠 만큼 냉혹함을 유지한다.
자신과 가까운 관계인 강준희의 전 상사 장 부장을 만나 희망퇴직을 권하면서는 “형님이 한 번 더 도와달라”면서 “이번 일이 다 끝나면 제가 소주 한잔 사겠다”며 간단명료하게 통보하고 자리를 일어선다.
어차피 잔인한 업무, 드라이하게 매듭짓는 게 낫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
런 그와 매번 대립하는 같은 인사과 고참 배 부장(김영웅)은 팀장을 향해 “어떤 의미에서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삶은 해야 할 일 투성이다. 이 해야 할 일이란 사실 인간들 모두 각자 하고 싶은 일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실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없다. 서슴없이 저지를 일만 수두룩하다.
모두가 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 그 욕망이 교차하고 어긋나면서 무수하게 해야 할 일들,
안 해도 될 일들을 만들어 낸 것 뿐이다.
그러니 하고 싶은 일을 줄이면, 그러니까 욕망을 줄이면, 해야 할 일, 하고 싶지 않은 일도 그만큼 줄어 들 수 있다.
소유냐 삶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건 늘 그렇다.
우리 사회에 희망이 있다고 외치는, 독립영화 성취의 한 축
영화 ‘해야 할 일’은 9월25일 개봉된다. 추석 연휴에는 관객들이 어두운 얘기의 영화를 안 찾을 것으로 배급사는 내다 봤을 것이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겠다.
영화 ‘해야 할 일’은 역설적으로 매우 재미가 있으며, 서스펜스가 팽팽하고, 도무지 이 일(퇴직과 해고)들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 지에 대해 끝까지 궁금하게 만든다. 이런 얘기를 이렇게 재미있게 봐도 되는지 죄책감이 들 것이라고 얘기했던 건 그 때문이다.
출중한 시나리오가 돋보인다.
인물 간 거리와 갈등도 균형을 갖췄다.
이런 이야기일수록 치우치기가 쉬운데 그러지 않았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선언적이지 않은 것도 좋다. 그 덕에 공감대가 넓어졌다.
영화가 문어적이지 않고 구어적이어야 함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하반기 독립영화가 이룬 성취의 한 축을 톡톡이 보여 준다.
우리 사회에 희망이 남았다는 사실은
여전히 영화만이, ‘해야 할 일’같은 영화만이 부르짖고 있다.
출처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https://www.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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