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 쏘는 맛 없이 밍밍한 소주 닮아가는 신문들
이희용의 줌렌즈
지역별 주요 소주회사와 대표 제품.
진로 품귀 현상으로 곳곳에서 항의 소동 빚어
바로 전 해인 1975년 진로는 월평균 생산량 100만 상자를 돌파했다.
전체 소주 생산량의 42%를 차지하는 물량이었다.
가장 시장이 큰 수도권을 배정받기는 했으나 당시에는 지금보다 수도권 집중 현상이 덜해 전체 시장점유율이 대폭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500여 개나 되는 소주업체를 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 10개로 줄인 것은 시장경제체제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남은 업체들에게는 ‘고마운’ 일이었다.
특히 비수도권 업체들은 권력이 해당 지역 독점을 보장해준 셈이어서 편하게 장사할 수 있었다.
품질 향상이나 서비스 개선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고 마케팅 전략도 고민할 까닭이 없었다.
자연히 품질은 떨어지고 술맛은 획일화됐다.
진로는 높은 인기에도 점유율이 제한된 탓에 곳곳에서 품귀 현상을 빚었다.
비수도권 주민 대부분은 향토 기업을 돕는다는 마음과 길든 입맛 때문에 자도주를 마셨지만 지방을 찾은 수도권 여행객과 지역의 진로 애호가들은 왜 “진로를 팔지 않느냐”고 항의하기 일쑤였다. 도매상들은 웃돈을 받고 소매상에 파는가 하면 가게나 술집 주인들은 단골손님에게만 몰래 내주기도 했다. 진로 말고 다른 소주를 찾는 주당들도 해당 지역이 아니면 마실 수가 없어 불만의 목소리가 높았다.
언론통폐합으로 비판의식 거세, 기사 누락, 왜곡보도 등 폐해
똑같은 일이 4년 뒤 언론계에서도 벌어졌다.
1980년 11월 14일 전두환 정권은 공영방송 체제 도입, 독과점 방지, 과당경쟁 완화, 주재기자 비리 근절 등을 내세워 신문·방송·뉴스통신·잡지 등에 걸쳐 대대적인 언론통폐합을 단행하며 신문시장도 소주시장처럼 1도1사 체제로 개편했다.
서울은 종합일간지 6개, 경제지 2개, 영자지 1개로 통폐합했다. 나머지 지역에는 경인일보, 강원일보, 대전일보, 충청일보, 전북일보, 광주일보, 대구매일신문(1988년 매일신문으로 제호 변경), 부산일보, 경남신문, 제주신문(1996년 제주일보로 제호 변경) 하나씩만 두었다. 동양통신·합동통신 등을 아우르는 연합통신(1998년 연합뉴스로 사명 변경)도 신설했다.
서울에서 발행되는 신문사들은 지방 주재기자를 두지 못했고, 지역지도 서울에 있던 주재기자를 철수시켰다.
중앙지의 지역 기사나 지방지의 서울 기사는 모두 연합통신 기사를 전재(轉載)하는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 정권의 속셈은 저항적인 언론인들을 내쫓고 언론을 체제에 순응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후 언론통폐합 때 살아남은 신문들은 안정된 시장 환경 속에서 호황을 누리고 언론인들의 급료도 뛰어올랐으나
그로 인한 상처는 깊었고 폐해와 부작용도 많았다.
가장 큰 문제는 비판의식이 거세된 것이었다.
보도지침이 아니어도 알아서 기는 행태가 자리 잡았고,
담합에 의한 기사 누락이나 왜곡보도도 속출했다.
신문들의 논조는 획일화되고 신문의 질도 하향 평준화됐다.
연합통신 독점에 따라 오보가 모든 신문으로 확산되는 소동도 끊이지 않았다.
서울에서는 그래도 신문·방송사가 많아 덜하지만 지역에서는
방송사 2곳, 신문사 1곳, 뉴스통신 1곳이니 크로스체크를 할 가능성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1982년 11월 경남 함안에서 개가 물에 빠진 소년을 구했다는 연합통신의 오보가 전국의 모든 신문을 장식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지금도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나긴 하지만 복수의 현지 신문이 존재하거나 중앙지 주재기자가 있었다면 오보의 파장이 줄었거나 금방 바로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족보 들여다 봐도 잘 알 수 없는 소주 세계의 흥망성쇠
소주시장의 자도주 보호 규정은 1989년 40%로 완화됐다가 1992년 폐지됐다.
1995년 주세법 개정으로 이듬해 부활했으나 1996년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완전히 사라져 무한경쟁시대를 맞았다.
강원도의 경월소주는 1993년 두산그룹에 인수돼 두산경월로 이름을 바꾼 뒤 1994년 그린소주를 내놓았다.
OB맥주의 판매망을 활용해 시장점유율을 16%까지 끌어올리며 진로의 아성을 위협했다.
무학은 1995년 국내 최초로 알코올 도수 23도인 화이트를 선보였다.
대선은 선(鮮), 스페셜선, 선타임, 선골드 시리즈에 이어 1996년 23도짜리 C1을 개발했다.
금복주도 1994년 참소주,
보해는 1994년 시티와 1997년 곰바우,
보배는 1995년 그린20,
한일은 1993년 한라산을 출시하며 시장이 가장 큰 수도권 공략에 나섰다.
진로는 두산과 지방업체들의 공세 속에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다가 1997년 9월 부도 사태를 맞았다. 회사 임직원들은 이듬해 10월 탄생한 23도 신제품 참이슬을 들고 거리로 나가 “국민주인 진로소주가 외국 자본에 넘어가지 않도록 도와 달라”며 판촉 활동을 벌였다.
진로는 법정관리 체제에서도 애주가들의 애국심, 임직원들의 눈물겨운 마케팅 노력, 성공적인 참이슬 브랜드 전략 등이 어우러져 시장점유율 50% 이상을 유지했다. 2005년 진로를 인수한 하이트진로는 업계의 마지노선이라고 여겨지던 20도를 깨고 2007년 19.8도 참이슬 후레쉬를 내놓은 것을 시작으로 차츰 알코올 함량을 줄여가다 올해 2월 16도까지 낮췄다.
두산경월은 2001년 산을 내놓았다가 별 재미를 보지 못하고 2006년 처음처럼으로 빅히트를 쳤다. 2009년에는 롯데칠성음료가 두산그룹의 주류사업 부문을 사들였다.
‘참이슬’ ‘처음처럼’ 합친 점유율 80%… 맥 못추는 지역 맥주
백학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하이트맥주에 인수되기도 했던 충북소주도 2011년 롯데에 넘어가 시원한청풍을 내놓았다.
보배는 1995년 7월 부도 처리된 뒤 1997년 하이트에 인수됐다. 지금은 하이트진로 소속으로 하이트소주를 판매하고 있다.
보해는 2002년 잎새주를 내놓았고,
무학은 2006년부터 좋은데이를 대표 상품으로 밀고 있다.
선양은 맑을린, O2린, 이제우린 등 린 시리즈를 잇따라 출시했다.
대선주조의 주력 상품은 C1에서 다시 대선으로 돌아왔다.
한일은 1999년 한라산으로 사명을 변경하고 2014년 한라산올래를 내놓았다가
대표 브랜드를 한라산21과 한라산17로 환원했다.
지난해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집계에 따르면 소주업체들의 시장점유율은
하이트진로(참이슬) 59.8%, 롯데칠성(처음처럼) 18.0%,
무학(좋은데이) 8.0%, 금복주(참소주) 4.1%, 대선 3.3% 순이다.
참이슬과 처음처럼을 합치면 80%에 육박한다.
마케팅 인사이트 2010년 통계를 보면 제주(한라산) 89.5%, 광주·전남(잎새주) 64.8%, 대구·경북(참소주) 61.9%, 울산·경남(좋은데이) 58.8%, 부산(C1) 46.9% 등으로 서울에서 비교적 먼 지역은 자도주가 해당 지역에서 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반면에 대전·충남(오투린) 26.7%, 충북(시원), 24.4%, 전북(하이트) 20.7% 등으로 서울과 가까운 지역은 참이슬과 처음처럼의 공세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지역 소주의 점유율은 해가 갈수록 떨어져 지금은 50%를 넘는 곳을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알려졌다. 사람들의 이동이 늘어나고 물류 유통이 발달한 까닭도 있겠지만 지역 곳곳에 공장을 두고 전국적인 판매망을 갖고 있는 대기업들의 공격적인 마케팅에 맥을 못추는 것이다.
언론계도 무한경쟁시대 맞아 지방지 몰락
신문의 1도1사 체제는 1987년 11월 언론기본법이 폐지되면서 무너졌다.
국제신문, 경남일보, 영남일보 등이 속속 복간하고 신생지가 대거 등장했다. 서울에서도 서울경제와 내외경제(헤럴드경제) 등이 복간하고 한겨레, 중앙경제, 국민, 세계, 문화 등이 창간됐다.
경쟁 체제로 바뀌긴 했어도 상당 기간 1도1사 시절 살아남은 한국지방신문협회(한신협) 소속 신문들이 해당 지역에서 복간지나 신생지들을 제치고 점유율 1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증면과 판촉 경쟁이 불을 뿜고 지방 경제가 불황의 늪에 빠지면서 중앙지의 지역시장 침투가 빠르게 진행됐다. 지역신문사 윤전기를 빌려 신문을 인쇄할 수 있는 기술이 등장한 것도 운송 부담을 줄여 이를 가속화했다.
한국광고주협회의 지역별 신문 가구구독률을 살펴보면 이미 2006년 부산(부산일보)과 대구(매일신문)를 제외하고는 모든 지역에서 조중동 세 신문 가운데 하나가 1위였다.
2010년에는 부산, 강원, 제주만 지역지가 1위였고 대구에서도 매일신문이 2위로 밀려났다.
최근 지역별 통계는 나온 것이 없으나 서울과 지방의 격차는 훨씬 더 벌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맛에 큰 차이가 없는 소주보다도 콘텐츠가 차별화돼야 할 신문이 ‘지역 실종’ 현상을 훨씬 빨리 체감하고 있는 것이다.
2021년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열독률 조사에서는 조선(3.736%), 중앙(2.452%), 동아(1.951%), 매일경제(0.976%), 농민신문(0.725%), 한겨레(0.626%), 한국경제(0.437%), 경향(0.412%), 한국(0.311%), 스포츠조선(0.280%)이 차례로 10위권을 형성했다.
지방지 순위는 11위 부산일보(0.280%), 12위 매일신문(0.168%), 13위 국제신문(0.149%), 14위 강원일보(0.132%), 20위 대전일보(0.075%), 21위 영남일보(0.062%), 22위 광주일보(0.062%), 24위 강원도민일보(0.055%), 27위 전북일보(0.045%), 28위 한라일보(0.042%), 29위 경남일보(0.042%) 등이었다.
소주시장 남고북저, 신문시장 동고서저 ‘우리가 남이가’
소주시장은 전국주 참이슬과 처음처럼이 장악하고 있는 수도권과 강원을 제외하면 남고북저(南高北低) 현상을 보인다. 광주·전남, 대구·경북, 부산, 울산·경남이 충청과 전북에 비해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신문은 수도권과 제주를 제외하면 동고서저(東高西低) 경향을 띤다. 영남보다 경제력이 뒤지고 시장도 작은 충청과 호남에 신문사 수가 훨씬 더 많은 것도 관련이 깊다.
공통적으로 영남권 소비자들이 해당 지역에서 생산되고 발행되는 소주와 신문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
지역경제 규모나 경쟁 환경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우리가 남이가’ 정신이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세월은 흘러 세상은 박정희·전두환 시대와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권위주의 정권들이 소주시장과 신문시장에 끼친 영향은 지금도 남아 있고 둘은 평행이론처럼 묘하게 닮았다. 소주 도수가 낮아져 쓴맛과 톡 쏘는 맛이 없어지고 순하고 달착지근해졌듯이 신문도 권력에 의해 순치되고 순화돼 날카로운 비판과 쓴소리가 사라지고 듣기 좋은 말만 쏟아낸다. 소비자들의 구미에 맞추겠다며 소주업체들이 과일맛 소주나 칵테일·하이볼 등을 내놓는 것처럼 신문들도 자극적인 소재와 연성 기사에 매달리고 있다.
출처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https://www.mindl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