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있는 자리에 내가 없는 건 아닐까
배정한의 공간이 전하는 말
수정 2024-12-13 13:16 등록 2024-12-13 12:01
혼자 밥 먹는 건 세상 외로운 일인 줄 알았는데 언제부턴가 ‘혼밥’이 편하다.
나만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학교 식당에서 둘러보면 어림잡아 절반은 스마트폰을 친구 삼은 혼밥족이다.
나는 단 15분이라도 ‘디지털 디톡스’를 실천하자는 마음으로 한 손에 잡히는 가볍고 얇은 책 한 권을 들고 식당에 간다.
가장 아끼는 동반자는 줌파 라히리의 ‘내가 있는 곳’.
아무 데나 펼쳐 두세쪽 읽으며 혼밥을 즐긴다.
표지가 너덜너덜해져 다시 샀는데, 얼마 전엔 그만 된장국을 엎질러 또 한 권을 샀다.
‘내가 있는 곳’은 영국 런던의 인도 벵골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미국 로드아일랜드로 이민해 성장한 경계인인 줌파 라히리가 낯선 언어인 이탈리아어로 쓴 소설이다.
“장소를 옮길 때마다 나는 너무나 큰 슬픔을 느낀다. (…) 충격을 받을 때마다 출렁이는 단지 속 액체처럼 이동 자체가 나를 흔든다.”
이탈로 스베보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하는 소설은 주인공이 사는 도시의 여러 장소를 배경으로 한 마흔여섯편의 짧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각 이야기의 제목은 모두 ‘○○에서’인데,
○○를 채우는 단어는 집,
그의 집,
엄마의 집,
심리상담사의 집,
침대,
발코니,
거울,
그늘,
사무실,
보도,
길거리,
산책길,
공원,
광장,
서점,
문구점,
식당,
카페,
슈퍼마켓,
계산대,
뷰티숍,
수영장,
박물관,
빌라,
바다,
호텔,
휴가지,
묘소,
병원 대기실,
역,
매표소,
기차 안 등
그(와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장소들이다.
주인공은 일상의 익숙한 장소들과 관계 맺으며 자신의 자리에 뿌리내리고자 애쓰지만 늘 힘들어한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 끊임없이 질문한다.
현재의 자리에 머물려 하면서도 새로운 자리를 열망하는, 불안과 기대가 교차한다.
마침내 주인공은 계속 거주해온 도시를 떠나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외국에서 1년을 보내기로 한다.
‘아무 데서도’라는 제목을 단 마흔다섯번째 이야기에서 그는 묻는다.
“머물기보다 나는 늘 도착하기를, 아니면 다시 들어가기를, 아니면 떠나기를 기다리며 언제나 움직인다. (…)
우리가 스쳐 지나지 않고 머물 어떤 곳이 있을까?”
그리고 답한다.
“방향 잃은, 길 잃은, 당황한, 어긋난, 표류하는, 혼란스러운, 어지러운, 허둥지둥대는, 뿌리 뽑힌, 갈팡질팡하는.
이런 단어의 관계 속에 나는 다시 처했다.
바로 이곳이 내가 사는 곳, 날 세상에 내려놓는 말들이다.”
소설 속 도시에는 이름이 없다. 주인공의 직업과 나이대를 짐작할 수는 있지만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이런 넓은 여백이 있어서 독자는 그의 상황과 감정에 나를, 우리를 능동적으로 대입하게 된다.
그의 장소와 이동 동선을 둘러싸고 뚝뚝 끊기면서도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에 나의, 우리의 장소 기억이 호출되고 중첩된다.
내가 있는 자리에 내가 없는 것은 아닐까.
산다는 건 결국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다.
머무르고 떠나며 공간과 관계 맺는 과정에서 삶의 의미와 기억이 자란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간은 우리에게, 두터운 구체성이 삭제된, 추상적인 선만을 기억하게 하지만……
우리가 오랜 머무름에 의해 구체화된, 지속의 아름다운 화석을 발견하는 것은, 공간에 의해서, 공간 가운데서”다.
사건과 의미와 기억이 쌓여 공간은 장소가 된다.
공간은 경험을 통해 장소가 된다.
인문지리학자 에드워드 렐프는 ‘장소와 장소 상실’에서 “사람이 된다는 건 의미 있는 장소로 가득 찬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라 말한다. “사람답게 산다는 건 나의 장소를 가지고 나의 장소를 안다는 뜻이다.” 공간을 넘어 장소와 관계 맺고, 즉 자신의 자리를 잡고 살고 싶은 게 줌파 라히리의 주인공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바람이다.
하지만 마땅한 자리에 안온하게 거주하고 노동하며 산다는 건 지난한 일이다.
라히리의 주인공처럼 우리는 누구나 한 장소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표류하며 방향을 잃고 갈팡질팡한다. ‘장소 상실’(placelessness)에 불안해하며 자신의 장소를 갈구한다.
“거기엔 그곳이 없다.”(There is no there there.) 데어(there)가 세번이나 들어간 이 짧은 문장만큼 장소 상실을 또렷이 설명해주는 표현은 없을 것 같다. 작가 토미 오렌지는 고향을 빼앗긴 ‘도시 인디언’들의 역사와 자화상을 그린 소설 ‘데어 데어’를 쓰기 위해 자료 조사를 하다 거트루드 스타인의 ‘모두의 자서전’에서 이 문장을 발견하고 깊이 공감해 책 제목에 담았다고 한다.
“거기엔 그곳이 없다”는 유럽에서 돌아온 스타인이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를 30년 만에 다시 찾았으나 유년의 집과 농장이 주택단지와 공원으로 탈바꿈한 걸 목격하고 안타까워하며 남긴 말이다. 물론 이런 대규모 도시 개발을 통해서만 장소 상실이 일어나는 건 아니다.
강제 이주자나 유배자, 이민자나 난민, 라히리 같은 지리적 경계인만 장소 상실을 겪는 것도 아니다. 자본주의 도시의 탈맥락화, 획일화, 표준화는 우리와 엮인 장소의 대부분을 납작하고 평평하게 만들어 장소의 의미와 기억을 소거한다. 라히리의 주인공과 우리는 나의 자리가, 나를 위한 자리가 없다는 불안감과 당혹감을 겪으며 살아간다.
오늘도 매일 머무는 연구실에서 시간을 보내다 매일 가는 식당에서 혼밥으로 배를 채우며 ‘내가 있는 곳’을 펼쳤다.
번역자 이승수는 소설 제목을 의문문으로 바꾸면 “난 어디에 있을까”일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있는 자리에 내가 없는 것은 아닐까.
매일 걷는 교내 산책길로 걸음을 옮기다 방향을 돌려 한강행 버스에 올라탔다.
강바람이 세차고 첫눈이 채 녹지 않았지만, 선유도공원은 여느 때처럼 나를 환대한다.
줄지어 선 미루나무 밑 작은 벤치가 나에게 자리를 내준다.
정수장 시절의 울퉁불퉁한 콘크리트 생살과 짙은 물 얼룩 위로 예리한 겨울 햇살이 떨어진다.
내가 있는 곳에 내가 있기를. 나의 자리를 더 살피고 돌보리라 생각하며 겨울 공원의 오후를 보냈다.
배정한 |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공원의 위로’ 저자
환경미학자이자 조경비평가인 배정한이 일상의 도시, 공간, 장소, 풍경에 얽힌 이야기를 전한다.
'책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강 “느낀 감각들 문장에 불어넣어…언어, 우리를 잇는 실이라 실감” (1) | 2024.12.14 |
---|---|
심장에 남은 만남과 인연 [서울 말고] (3) | 2024.12.06 |
12월은 무려 31개의 날을 안고 있다 (3) | 2024.12.03 |
한강 이후의 한국 문학과 출판 (6) | 2024.11.28 |
단어의 시민권에 대하여 (1) | 2024.1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