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우상의 황혼

닭털주 2022. 2. 19. 13:37

우상의 황혼

 

이세영 논설위원

 

 

이진경, 진중권, 안치환.

 

한국 급진주의를 현대화한 주역으로 난 주저 없이 이 세 사람을 꼽는다.

개인 경험과 또래 집단 분위기가 반영된 주관적 판단이니, 누군가 정색하고 반박하면 힘들여 쟁론할 생각까진 없다. 이들은 소박한 민중주의와 자폐적 민족주의에 긴박됐던 한국의 급진주의를 순수이성(이론)과 실천이성(도덕), 취미판단(예술) 영역에서 세계 시간의 눈금에 맞게 정렬시켰다.

한국 좌파는 이진경에게 지적 엄밀함과 의제의 첨단성을,

진중권에겐 정치·도덕 판단의 엄정함을,

안치환에겐 넉넉한 서정과 정교한 심미안을 빚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현대화를 선취한 서구인들이 오랜 논쟁 끝에 합의한 모더니티(문화적 현대화)의 핵심은 이것이다. 종교와 형이상학이 지배하던 문화 영역이 독자 기준과 논리를 추구하는 세개의 가치 영역(과학·도덕·예술)으로 분화되는 것. 칸트가 인간 이성의 작동 원리와 한계를 규명한 자신의 비판 철학을 <순수이성 비판> <실천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3부작으로 구성한 것도 이 같은 모더니티 기획에 충실한 선택이었다.

현대화와 더불어 독립 영토를 구축한 과학·도덕·예술은 각각 진(명제적 진리성(규범적 정당성(예술적 진실성)라는 자족 기준을 따라 조직되고 움직인다. 과학적 진리 조건을 충족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타당하다거나, 도덕적으로 흠잡을 데 없으니 미적으로도 탁월하다는 평가가 더는 발붙일 여지가 없어진 것이다.

위르겐 하버마스의 표현을 빌리면, 모더니티 기획이란 객관적 과학, 보편적 법과 도덕, 자율적 예술을 각각의 내적 논리에 따라 발전시키고, 그렇게 쌓인 인지적 잠재력을 외부로 개방해 일상의 삶을 합리적으로 재편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다.

이진경·진중권·안치환의 탁월함은 전문성의 폐쇄 회로에 갇히지 않고 각자가 성취한 이론과 현실비평과 저항예술의 새로움을 대중의 언어와 감수성에 맞춰 친절하게 풀어낸 데 있었다.

적어도 1990년대 이후 청년기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근대 서양철학과 난해하기 짝이 없는 탈현대 사상까지도 떠먹여주는 수준'에서 정리한 이진경의 철학서 연작,

진영을 가려 말 바꾸지 않고 한국 정치의 후진성과 사회문화적 습속의 비합리성과 대결해온 진중권의 전투적 먹물 정신,

서정과 자유 정신과 미적 성취의 희생 없이도 비판과 저항의 메시지를 설득력 있게 담아낸 안치환의 노래들로부터 지적·문화적으로 향도받지 않은 이가 드물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론가와 비평가와 예술가의 이상'이었던, 그래서 자기 세대와 아랫세대의 우상'으로 군림해온 인문정신의 세 위격이 얼마간의 시차를 두고 자멸해버렸다.

조국 사태가 만들어낸 총체적 카오스 속에서 친조국의 길을 간 이진경은 그깟 표창장 하나라는 주문에 의지해, 확인된 사실의 존재조차 부인하는 주관적 관념론으로 퇴행했다. ‘반조국을 택해 옛 친구들의 비난과 따돌림에 시달리던 진중권은 어느 순간 밤의 윤핵관이란 비아냥을 감수하며 과거 자신이 싸우던 세력에게 승리 전략을 조언하는 단계까지 흑화했다. 거짓이 압도하는 정치 현실을 풍자한다는 구실로 풍문과 편견에 기대 성과 인종 비하의 저급 프로파간다를 시전한 안치환은 또 어떤가.

세대를 넘나들며 인정과 우러름을 받던 래디컬 진··의 자발적 떼죽음에 실망을 넘어 참담함을 토로하는 이가 주변에 상당하다.

이 난감한 상황을 이해해보려 이리저리 머리 굴려보지만 답을 찾기가 쉽지 않다.

학생운동권 출신의 비주류 선민의식’,

계급이 아닌 정파에 감정이입하며 만들어진 정당 정파성’,

엘리트의 강한 자기 확신’,

이 모든 것들이 대선이라는 정치적 내전 국면의 파국론적 정서와 결합해 빚어낸 정치적 죽음 충동’. 현재로선 이 사태의 배후를 이 정도로 막연히 추측해볼 뿐이다.

그런 점에서 내게 이들의 죽음은 개인이 아닌 세대의 죽음이자,

세 우상의 주도로 현대화된 ‘386 급진주의 의 지적·도덕적 파산으로 의미 지어진다 .

파괴된 우상은 동경이 아닌 망각과 극복의 대상이다.

우리가 이들의 죽음 앞에서 취해야 할 최선의 태도는 비탄과 애도가 아니라, 빗자루를 쥐는 것이다. 조각난 성상의 파편들을 남김없이 쓸어내며 조용히 읊조리는 것이다. “상처에 의해 정신이 성장하고 힘이 솟는다.”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중에서)

 

mona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