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히틀러의 ‘생활 공간’과 푸틴의 ‘러시아 세계’

닭털주 2022. 3. 1. 13:50

히틀러의 생활 공간과 푸틴의 러시아 세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이스라엘 시민들이 지난 24(현지 시각) 수도 텔아비브의 러시아대사관 앞에서 푸틴과 히틀러의 얼굴을 합성한 사진이 실린 플래카드와 우크라이나 국기를 들고 시위를 하고 있다. 플래카드에는 푸틴은 러시아를 떠나라고 적혀 있다. 텔아비브/AFP 연합뉴스

 

정의길 | 선임기자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와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은 전쟁의 산물이다.

히틀러를 낳은 1차 세계대전은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으로 불리었다.

푸틴을 낳은 냉전의 종식은 역사의 종언이라는 평가를 낳았다.

더 이상의 역사 발전은 없다는 자신감을 자아냈다.

하지만 히틀러는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감행해 신냉전을 도래시켰다.

 

히틀러와 푸틴의 팽창주의, 대국주의 부활 욕구가 동인이다.

관건은 압도적인 명분과 힘을 가진 승전국들이 지리멸렬해진 패전국들을 규율했는데도 그들이 다시 전쟁에 나서게 했다는 것이다.

전후의 국제관계를 서로 인정하는 냉정한 현실주의보다는 한쪽의 이념과 가치에 경도된 이상주의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상주의는 패전국들의 잠재적인 국력과 영향권을 무시하고 옥죄어서, 결국 히틀러와 푸틴으로 상징되는 팽창주의와 대국주의 부활의 반동으로 귀결됐다.

1차 세계대전 이후의 베르사이유 체제나, 냉전 이후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는 유사하다.

베르사이유 체제는 민족자결주의와 국제연맹으로 상징되는 항구적 평화를 기대했다.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도 미국이 주도하는 규칙 기반의 다자적 질서에 모든 국가가 규율될 것으로 예상했다.

반면 패전국인 독일과 러시아를 철저히 해체하려 했다.

그 결과 두 나라는 국제체제에서 잠재적 국력과 영향권을 인정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 국가 취급을 받았다.

베르사이유 체제에서 독일은 가혹한 배상금에다가 중동부 유럽에 걸친 게르만족 영역을 모두 상실당했다. 베르사이유 체제의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 독일의 영향권을 해체하기 위해 중동부 유럽의 새로운 국가들의 독립에만 적용됐다.

국제연맹을 제안한 미국은 가입하지 않았고 유럽에서도 철수했다.

영국은 1차 세계대전으로 국력이 약화된데다 전통적인 영예로운 고립노선으로 유럽 대륙의 문제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볼셰비키 혁명으로 소련으로 바뀌어 국제체제에서 철수했다.

유럽에 남은 것은 허약해진 프랑스와 불만에 찬 독일이었다.

독일 주변에는 힘 없는 신생국가들만 있었다.

독일 국민들의 불만에 기대어 집권한 히틀러는 게르만족의 세력권인 생활 공간’(레벤스라움)의 복원을 주장했다.

독일 제3제국을 부활하고는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푸틴의 러시아는 이번 우크라이나 침공의 원인으로 주장하는 나토의 동진에 맞서는 러시아의 세력권 인정을 요구했다.

푸틴이 주장하는 러시아의 세력권이란 독일의 레벤스라움에 비견되는 러시아 세계’(루스키 미르) 개념이다. 소련의 해체와 나토의 동진 확장이 전통적이고 역사적인 러시아의 공간을 해체하고 위협했다고 푸틴의 러시아는 반발해왔다. 러시아 세계라는 지정학적 개념은 소련 해체 뒤 러시아가 극도로 피폐해졌던 1990년대 후반에 고안됐다. 이는 2000년대 들어 집권한 푸틴에 의해 러시아의 대외정책을 뒷받침하는 담론이 됐다.

히틀러의 생활 공간이나 푸틴의 러시아 세계가 전쟁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설명할 수는 있다.

베르사이유 조약 체결 때 영국 대표단 참모로 일한 에드워드 핼릿 카는 독일에 대한 막대한 배상금 징구와 독일의 땅을 폴란드에 넘겨주는 국경선 획정에 반대했다. 그는 독일에 가혹한 베르사이유 체제가 히틀러의 집권을 낳고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고 봤다. 그는 잠재적인 국력을 갖춘 국가들의 현실적인 국익과 권력의지를 도외시한 채 이상주의에 도취된 당시의 국제관계를 명저 <20년의 위기>에서 잘 설명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소련에 대한 봉쇄 정책의 설계자인 조지 케넌은 미국 상원이 동유럽 국가들로 나토 확장을 비준한 직후인 19985월 이에 관해 질문한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에게 이렇게 답했다. 20년 전이다.

이는 신냉전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비극적인 실수이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다. 나토 확장은 우리 건국의 아버지들을 무덤에서 돌아눕게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소비에트 체제를 무너뜨린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무혈혁명을 일으킨 그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고 있다. 물론 러시아의 나쁜 반응이 있을 것이고, 그럼 나토 확장론자들은 러시아가 어떠한지 우리가 항상 말하지 않았냐고 말할 것이다.”

정의로운 전쟁이나 위대한 전쟁은 없다. 잔인하고, 더러운 전쟁만이 있다.

인류는 그런 전쟁을 문제 해결 수단으로 삼아 왔다.

역사의 책임은 이런 전쟁을 일으킨 이들뿐만 아니라 막을 수 있었던 이들에게도 있다.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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