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페미니즘과 휴머니즘

닭털주 2022. 3. 8. 17:55

페미니즘과 휴머니즘

 

권김현영 | 여성학 연구자

 

 

윤석열 후보는 20대 대통령 선거 마지막 토론에서 페미니즘이 뭐라고 생각하냐는 이재명 후보의 질문에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의 하나라고 답했다.

이 발언이 페미니즘에 대한 무지와 오해를 드러냈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 맞지만 안티페미니즘을 주요 선거전략으로 활용해온 윤 후보가 저렇게 말하는 건 거짓과 위선이라는 사람도 있다.

토론이 끝난 다음날부터 기자들로부터 윤 후보가 말한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라는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았다.

이 칼럼으로 답변을 대신하고자 한다.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둘 다 맞는 말이다.

휴머니즘이 인간다움을 존중하는 넓은 의미의 태도라고 정의한다면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 맞다. 페미니즘은 여성은 남성에게 귀속된 존재가 아니라 개인이며, 여성은 시민으로서 동등하다고 주장해왔다. “페미니즘은 여성도 인간이라는 급진적 믿음이라는 말은 가장 유명한 페미니스트 슬로건 중 하나다.

여성도 인간이라는 당연한 말이 여전히 급진적믿음이 되는 이유는 여성 혐오로 유명한 거대 남초 사이트들 몇개만 둘러봐도 알 수 있다.

그곳에는 여성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말이 가득하다.

이들은 여성가족부 폐지가 곧 여성의 노예화 수단인 것처럼 선전한다.

이들은 여성가족부만 폐지되면 분노한 여성들이 다시 남성들에게 돌아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제 여성들과 연애하고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것이며 여성들이 페미니스트들의 선동에 더 이상 놀아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여성들이 남성과의 연애와 결혼을 통해서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으며 그렇지 않은 선택을 한 여성들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며 투표권을 빼앗자는 말도 서슴지 않고 나온다. 이렇게 여성이 인간이라는 명제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있기 때문에, 2022년에도 여전히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 맞다.

하지만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이들에게 여성이 인간이라고 말해봤자 무슨 소용인지는 모르겠다.

지금은 여성이 인간이라는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남성 스스로가 생물학적 신체의 차이를 강조하며 남자는 짐승이라거나 남자의 성욕은 어쩔 수 없는 본능이라거나 힘의 차이를 인정하라는 식의 이야기에 저항하며 인간으로서의 남성됨을 주장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라는 명제는 여성인간이라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인간 취급하지 않는 남성이 과연 인간인지를 물어야 한다는 의미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 아니며, 휴머니즘을 언제나 초과하고 갱신해왔다.

휴머니즘은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는 믿음에 근거를 두는데,

이때 남성만이 이성의 담지자로, 여성은 상대적으로 열등하다는 성차별적 편견이 작동하여 여성의 의사결정 능력과 권리가 제한되었다.

페미니즘은 이성은 오직 남성만의 것이라는 전제가 허구라는 걸 밝혀내는 동시에 체계적으로 무시당해왔던 감정의 중요성에도 주목했고, 이성과 감정의 이분법적 구분이 오히려 세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휴머니즘은 원래의 급진적 의미를 잃고 인간중심주의가 되어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할 생각 없이 개인의 자율성을 강조하다가 결과적으로 힘이 곧 정의라는 패권적 세계관으로 타락해갔다.

인간이되 인간으로서의 몫과 권리가 주어지지 않은 인간들과 비인간동물들에게

휴머니즘은 더 이상 희망이 아니라 폭력이 된다는 점에 주목하는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 아니며, 아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윤석열 후보의 답변을 듣고 심상정 후보는 놀라운 말씀이라고 했다.

나도 마찬가지 심정이다.

다만 페미니즘이 휴머니즘이라고 해서 놀란 것이 아니라

윤 후보가 휴머니즘을 입에 올렸기 때문에 놀랐다.

휴머니즘의 핵심 정신은 초자연주의를 비롯한 비과학적인 세계관과의 단절이다.

윤 후보는 무속신앙과의 연루설은 둘째치고 한국의 대표적인 우파 목사로 알려진 김장환 목사에게 성경책을 선물받았다고 자랑하며 여의도순복음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으니 사상으로서의 휴머니즘에 동의한다고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주당 120시간 노동과 같은 살인적인 노동마저도 찬성했고, 말이 아닌 힘으로 전쟁을 억지하겠다고 주장한다.

여기 어디에 휴머니즘이 있는지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